▶따스한 손길이 있어
사람마다 어린 시절에 겪은 크고 작은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말 없는 아이로 성장하게 한 그 상처는 결혼 후 남편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더 강하게 떠올려졌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아무도 그 아이를 일으켜 주지 못했다. 내 안에 그 아이가 있다는 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동안 형제, 남편, 자녀, 친구가 그 아이를 일으켜 주기를 기대하며 살았다. 그 아이를 일으켜 줄 사람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건 바로 폐암 수술이었다. 나도 당당한 내 모습이 있다는 것을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파도타기에 도전한 이유였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춘 듯한 삶의 순간마다 조용히 다가와 등 뒤에 서 밀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변함없이 늘 나와 함께 있어 주는 손길, 나는 그 따스한 손길이 있어 파도타기에 도전할 용기도 냈다. 어린 자아가 두려움에 웅크릴 때마다 곁에 다가와 톡톡 등을 두드려 주며 ‘넌 혼자가 아니란다’, 라고, 말해주는 손길이었다.
나는 주저앉고 싶지 않아 파도타기를 배웠다. 내 안에 웅크린 아이가 얼마나 용기가 있는지 보고 싶었다. 밟힌 대로 그저 그런 모습으로 남기 싫었다. 아니라고, 내 모습은 그게 아니라고 몸부림치고 싶었다. 나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 모르는 체했어도 안 되는 거였다고.
▶포근한 품이 되고 싶어
어른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나를 바닷속에 가라앉히기도 하고 고꾸라뜨리기도 했다.
내가 갖는 관심은 나를 그 장소로 찾아가게 했다. 나는 오늘의 힘든 상황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았다. 활기 있게 살아가려는 사람들 속에 찾아갔다.
나는 거센 파도에 내 안에 웅크린 아집과 자격지심을 부숴버리고 있었다. 내 아집과 자격지심을 비우는 과정 중 하나가 파도타기였다.
나는 내 안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달싹 못 하는 어린 자아를 일으킬 힘을 기르고 싶었다. 파도타기는 그 힘을 길러 주었다. 보드 위에서 넘어지고 바닷물에 처박혀도 다시 일어나 생긋 미소 짓는 여유를 키웠다.
나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바다에 들어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두려움을 정복하기 위해 파도와 싸움을 했다.
나는 폐암 수술 후 내가 살기 위해 원망과 미움을 버렸다. 파도에 부딪히며 그 마음을 부숴버린다.
아픔을 겪고 나서야 성숙해진다는 걸 알지만, 절망에 가득 찬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마음이 아렸다.
파도타기를 하는 새로운 도전은 두려움과 절망을 기쁨으로 바꾸는 설렘을 안겨 주었다. 심장을 콩닥콩닥 뛰게 했다.
나는 딸이 내 품에 안겨 맘껏 울어 주어서 행복했다. 파도는 나에게 부드러운 힘을 키워 주었다.
▶ 출판소감문
뇌종양 수술, 자궁 적출 수술, 폐암 수술, 나에게 연거푸 닥쳐왔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기도 했고, 두려움에 떨며 움츠러들기도 했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야만 했습니다. 빠져나오는 방법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절망의 사건을 내 안에 숨겨진 나를 발견할 기회로 받아들였습니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자아를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일에 도전했습니다. 파도타기는 그 도전 중 하나였습니다. 수영장 물도 두려워하던 나였습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두려운 감정을 떨쳐 버려야만 했습니다. 두려운 감정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암이라는 두려움을 뛰어넘어 기쁨을 맛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꿈꾸던 내 삶을 보고 싶었습니다. 뒤죽박죽인 삶을 바로 세우고 싶었습니다. 나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 가정에 생긴 큰 일로 인해 홀로 보내야 했던 외로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었습니다. 혼자 버려진 듯한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외로운 감정을 토닥여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대학생 때 만난 남편이 내 마음을 다 이해해 줄 거라 믿었습니다. 나는 비어 있는 내 마음을 누가 채워 주기를 바랐습니다. 쉴 사이 없이 나를 휩쓸던 파도는 그런 내 생각을 부서뜨렸습니다.
어린 시절 나도 모르게 당한 일은 수치심이라는 올가미로 나를 옭아맸습니다. 누구 앞에서든 그 수치심 때문에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결혼 후, 남편의 부적절한 언행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내 나약함 때문에 가정을 바로 세워가지 못했습니다.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우리 가족은 각자 살기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남편은 남편 방식대로, 나와 두 자녀는 남편의 방법과는 다른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허우적댔습니다. 가족이 갈라졌습니다. 갈라진 틈새에서 두 자녀가 성장했습니다. 미움, 원망, 분노, 외로움과 싸운 삶이었습니다. 파도타기를 배우며 내 생각을 부서뜨려 가는 이야기를 글로 썼습니다.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원망했던 사람들은 내가 사랑해 줘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파도타기로 강해진 내면은 미국에서 지친 딸이 포근히 안길 수 있는 품이 되었습니다. 파도타기는 외로움과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쳐 있을 딸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따뜻한 성품으로 살아내려고 애쓰는 아들을 응원하는 도전이었습니다. 감추고 싶던 이야기를 드러냈습니다. 서로 다른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나와 남편 이야기입니다. 나와 남편은 서로 다른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를 안고 결혼했습니다. 성장하는 동안 아물지 않아 곪아 있던 상처는 결혼 후, 수시로 터졌습니다. 서로 긁힐까 봐 불안해하며 보듬어 주길 기대했습니다. 보듬어 줄 힘이 서로에게 없었습니다. 나와 남편은 곪아 터질듯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부모였습니다. 누구 앞에서든 겉모습은 아픈 곳 없이 깨끗했습니다. 서로 사랑해 줄 힘이 없던 남녀가 만나 결혼했습니다. 사랑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사랑을 주지 않는다며 지쳐갔습니다. 사랑받기만을 갈구하며 살아가는 부모였습니다. 그런 부모 곁에서 건강하게 살아내는 두 자녀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정리하는 동안 눈물도 자주 흘렸습니다. 절박했던 상황들이 떠올려졌기 때문입니다. 어둡고 간 터널을 언제 지나갈까! 싶었는데, 이제 연극 1막이 끝난 듯 합니다. 제 이야기이지만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다른 어머니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안한 가정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일 거로 생각합니다. 이 책이 출간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니 감사할 뿐입니다. 해낼 수 있다는 경험을 또 한 번 갖게 되어 기쁩니다. 이 책 출간을 기회로 한 발 더 내딛습니다. 웅크리지 않고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삶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미움, 원망, 분노, 외로웠던 감정을 책 속에 녹여 내면서 제 마음이 치유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나뭇가지가 상처를 입었을 때 스스로 치유하면서 생긴 울퉁불퉁한 모양 옹두리, 그 옹두리에서 나는 나무 향기가 가장 진하다고 합니다. 그 모양을 살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연의 무늬를 가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옹두리’ 같은 1막을 토대로, 2막을 준비합니다.
부족한 글을 꼼꼼하게 편집하여 주시고 출간하여 주신 마음 세상 출판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