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의 비밀로서의 우연과 그리움이 건축한 운명으로서의 삶
-이우디의 시 세계
-권온(문학평론가)
1.
이우디, 라는 이름은 단순한 시인(詩人)의 이름이 아니다. ‘이우디’는 이번 시집의 출간을 계기로 특정한 시인의 이름을 넘어서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우디, 라는 이름은 이제 그것 자체로 시(詩)가 되고, 음악이 되며, 예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집 「우연이 운명을 건넌다」가 독자에게 던지는 충격과 여운은 손쉽게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시집 제목에 배치한 “우연”과 “운명”이라는 2개의 명사와 “건넌다”라는 동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본질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로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2.
‘이터널(eternal)’은 영원한 또는 끊임없는,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우디는 ‘이터널’을 시의 제목으로 선택하여 제작하였다. 그녀가 제작한 영원한 이야기 또는 끊임없는 이야기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도와줄 수 있습니까
말(言)과 말이 서로 할퀴고 때렸을 때 부서지거나
깨어진 조각들은
기억을 잃었습니다
사라진 것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눈짓과 눈짓이 깎아내린 표정들은 민들레 깃털처럼 사랑으로
흩어진 채
혀를 잃었습니다
꿈이 떠난 것도 몰랐습니까
바다 위 팔랑거리는 노란 나비의 처음 모르듯 다음도 모르고
고장 난 에어컨처럼
투덜투덜 하루를 탕진했습니다
끈적한 살 밑에 묻은 혼잣말은 둥근지 뾰족한지
저장된 기억 죽일지 살릴지
매장된 나는
버린 건지 버려진 건지
말이 버린 몸을 찾는 중입니다
어제 지우개로 지운 이터널 라인을 다시 퍼 올리는 것은
내일의 피가 굳이
당신 쪽으로만 흐르는 까닭입니다
-「이터널」 전문
이우디는 세계를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말”과 “몸”을 함께 아우른다. ‘언어’와 ‘육체’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시인은 ‘시간’을 인식할 때에도 “어제”와 “내일”을 포괄하여 수용한다. 그녀가 지향하는 “하루”는 ‘오늘’이나 ‘어제’ 또는 ‘내일’일 수 있다.
이우디는 이 시에서 “이터널” 또는 ‘영원’을 제시하는데, 이와 같은 드러냄 뒤에는 ‘순간’이 위치한다. 또한 그녀는 “당신”을 소개함으로써 잠재되어 있는 ‘나’를 환기한다. 그리고 시인이 활용하는 “~습니까”의 반복과 “~지”의 반복은, 이 시의 리듬감을 고양하고, 음악과 시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하다.
너를 생각하면 목젖을 찢고 검은 구름이 자란다
한눈판 적 없는데 비가 엎질러진 밤, 덜 영근 꽃망울 터치고 가는 신경질적인 구급차 빛줄기 너머
너처럼, 나도
외로운 사람이다
쇼윈도 한 귀퉁이 중절모 안쪽을 울먹이는 마네킹처럼
잊힌 듯 잊히지 못한
너도, 양지꽃
나도, 양지꽃
마음속 나침반 좌표가 지목하는
너는, 이제
그리운 사람이다
-「너를 생각하면 목젖이 아프다」 전문
시적 화자 ‘나’가 주목하는 인물은 “너”이다. 이 시의 제목을 참조하면 ‘나’는 “너를 생각하면 목적이 아프다” ‘나’에게 ‘너’는 ‘아픔’으로서 다가온다. ‘너’가 ‘나’에게 괴로운 감정, 정서, 느낌으로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와 ‘나’는 서로에게 매우 소중한 관계였을 것이다. ‘너’와 ‘나’는 서로 닮은 점이 많은 사람들이다. 예전의 ‘너’가 그러했듯이, 이제 ‘나’도 “외로운 사람”이다. 외로운 사람으로서의 ‘너’와 함께 했던 추억이 늘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너는, 이제/ 그리운 사람이다” ‘나’에게 ‘너’는 “잊힌 듯 잊히지 못한” 대상일 수 있다. 이우디는 ‘너’와 이별한 ‘나’의 마음을 “쇼윈도 한 귀퉁이 중절모 안쪽을 울먹이는 마네킹”에 비유함으로써, ‘외로움’과 ‘그리움’이라는 특별한 감정을 ‘나’와 ‘너’ 모두에게 제공한다. “너도 양지꽃/ 나도 양지꽃”이라는 이 시의 5연은 ‘인간’과 ‘자연’의 소통과 교감을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독자들을 위로한다.
비정기적으로 오는 기념일이다
열여섯 열아홉 사이 지나가 버린 첫 경험은 아릿한 우연
스물 스물다섯 사이 내 사랑의 인트로
예외적인 설렘 따라 흘러내린 카를교 위 희고 붉은 한 호흡
멀어, 기억할 수 없는
실패한 아름다움은 꽃의 질감 알지 못하지만
어떤 우연은 영화처럼, 운명
파릇한 봄 수긍하던 기억이 그리움을 시작하면
노을빛 꿈의 내부
눈부신 조명 아래 천사들의 춤사위 나를 증명한다
칼리오페가 읊조린 보랏빛 한 줄 詩 더 좋은 나비 한 마리
흰 눈빛 하나로도 죽은 나무 허리께 연둣빛 부리 총총
우연이 운명을 건넌다
작고 가벼운 것은 왜 이토록 다정한 거니
-「흰 기억」 전문
이우디는 이번 시집의 제목으로 “우연이 운명을 건넌다”라는 문장을 선택하였는데, 그 문장은 시 「흰 기억」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는 이 시를 향한 시인의 남다른 기대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초인간적인 힘’이라는 의미를 품은 ‘운명’은 낭만적인 성격을 마음껏 펼치면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이우디는 ‘우연’을 배치함으로써 ‘운명’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녀가 제시하는 ‘우연’은 “예외적인” 성격을 지닌 “비정기적으로 오는” 어떤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은 과학이나 논리 또는 이성의 관점을 벗어난 ‘우연’에 의해서 ‘운명’이라는 이름의 정해진 길에 새로운 가능성이 발생한다고 믿는 것일까?
이우디는 “기억”과 “호흡”에 “흰”, “희고 붉은”이라는 색채를 덧입히는데, 이와 같은 독특한 색칠하기는 우연으로서의 운명 또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잊을 수 없는 “인트로” 또는 “첫 경험”일 수 있다. 우연과 운명의 조화를 담은 최초의 기록으로서의 시가 이렇게 탄생한다.
3.
이우디는 시와 시조를 아우르는 시인이고, 제주의 자연을 자신의 언어와 문장으로 녹여내는 시인이다. 이우디는 시집 서두의 ‘시인의 말’에서 “아직도 그립다”라고 진술한다. 그녀에게 내재한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이우디의 이번 시집은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마음에 관한 감성적인 기록일 수 있다. 그녀는 이 시집의 도처에서 ‘그립다’ ‘그리움’과 연결된 심경을 표출한다. 가령 「비문」이나 「거절증」에서의 ‘그리움’이나 「너를 생각하면 목적이 아프다」에서의 ‘그리운 사람’, 「기린이 그리운 날은」에서의 ‘그리운 날’ 등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된다.
이우디의 시집 제목은 ‘우연이 운명을 건넌다’이다. 어쩌면 그녀는 ‘운명’으로서의 ‘인생’을 회상하면서 ‘우연’의 결정적인 역할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연은 신이 익명으로 남기는 방법이다(Coincidence is God"s way of remaining anonymous).” 아인슈타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다면, ‘우연’은 ‘신’이 남몰래 행사하는 방법이 된다.
필자는 이번 시집에서 전개되는 이우디의 시 세계를 이렇게 규정하고 싶다. 신(神)의 비밀로서의 우연과 그리움이 건축한 운명으로서의 삶. 시인은 독자들에게 안내한다. 인간의 삶에는 신의 내밀한 손길이 담겨 있고, 삶은 우연과 운명이 뒤섞인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독자들로서는 이우디가 써 내려갈 앞으로의 시 세계에도, 드라마로서의 삶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