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힘으로 빚어낸 긍정의 언어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조승래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깊이’와 ‘넉넉함’이다. 그의 시들은 우리를 무한한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하여 안온한 긍정의 세계에 안착하도록 인도한다. 요설로 난삽해진 언어와 신경증인 예민한 감각만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피곤하게 하는 최근 시들을 읽다 조승래의 시들을 읽는 순간 사유의 깊이에서 오는 평안한 안정감이 이 모든 피로를 씻어준다. 그는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눈을 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일상에서 출발하여 인간 존재와 시간, 언어, 관계의 본질에까지 도달하는 그의 시편들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한 사유의 강을 건너게 한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조승래 시인은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여 그 안에 내재하는 진실을 들여다보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다. 이 깊은 시선과 오랜 삶의 연륜은 겉으로 보이는 피상적 세계를 삶의 내면을 바라보는 사유의 세계로 확장한다. 한 마디로 조승래 시인은 사물에 대한 구체적 감각 경험을 깊은 철학적 깨달음으로 심화시킬 줄 아는 시인이다. 그의 눈과 입을 통하면 모든 일상의 사물은 시적 언어로 변화되고 그것은 사유의 재료가 되어 삶의 경구로 재탄생한다. 이 글은 ‘사유의 깊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조승래 시인의 시편들이 일상을 철학으로, 감각을 존재론으로 전환하는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2. 사유의 힘과 감각의 언어
조승래 시인은 사물의 내면을 바라보는 특별한 눈을 가졌다. 이 눈으로 바라보는 사물은 일상을 벗어나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 다른 존재가 된다. ‘목검’, ‘영양 보조 식품’, ‘커피’, ‘텃밭’과 같은 일상적 소재는 시인의 손과 입을 거치며 사유의 언어로 재탄생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살펴보자.
3백 년 넘은 올리브나무를 깎아 만든
목검이 진열대 위에 누워 있다
스페인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한국에까지 와서 살아 있다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도 안 하므로
네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안다
내가 백 살 정도는 되어서
네 흉내를 내며 입을 다물면
내 귀도 열리어
말이 부질없어 침묵했다는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잇값을 치르고 난 뒤쯤에는
- 「나잇값」 전문
시인은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한 목검을 통해, 침묵이 지혜로 승화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올리브나무 목검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 목검의 기품있는 외양에 서려 있는 그것의 강도와 무게감은 구태여 그 목검을 휘둘러 보지 않아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말없이 놓여 있는 오래된 목검은 한 존재의 사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가진 생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 침묵을 아는 것이 “나잇값”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말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대개 사용된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강변하기 위해 말을 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말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귀를 닫는다. 하지만 입을 닫고 말을 멈추는 순간 우리의 귀는 열리게 된다. 그리고 그 귀가 열릴 때 우리가 얼마나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고 살았는지 깨닫게 된다. 말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지우는 것임에 반해, 침묵은 존재를 존재로 살아 있게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도 안 하므로/ 네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안다”라는 두 행이 바로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하는 빛나는 구절이다.
속까지 까맣게 태워 낸 불맛을 뜨겁게 내린 커피
잔 속에서 얼음조각을 만나 벌인 타협,
흑갈색 고집이 차가운 투명과 악수하며 만났지만
점차 커피는 연갈색으로 얼음은 빙하의 꿈을 버리며
시간의 얼굴을 씻고 있었어
아메리카노, 아이스의 불맛은 시원하지
찻잔의 바깥에는
시간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진땀이 차갑게 송송 슬고 있었어
- 「불의 맛」 전문
커피에서 불맛을 느끼는 시인의 예리한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인의 예민한 감각은 이미 볶아져 한 잔의 액체로 변하고 더욱이 “얼음조각”이 채워진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 안에 스며있는 불꽃의 맛을 감지해 내고 있다. 시인은 커피의 이 불맛과 얼음이 섞이는 장면을 통해 뜨거움과 차가움의 감각을 체현하게 하고 고집과 타협이라는 인간관계의 중요한 지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시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그러한 관계의 긴장감을 “진땀이 차갑게 송송 슬고 있”는 커피가 담기 유리잔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묘사하여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긴장 속에서 일상의 삶을 영위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그 긴장은 대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다. 사업을 하거나 물건을 파는 영업을 하거나 생산이나 유통 라인에 배속돼 작업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관계가 긴장을 만든다. 불맛과 얼음 사이에서 “진땀을 차갑게 송송 슬고” 있는 유리잔처럼 우리도 고집과 타협의 긴장 속에서 진땀 흘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감각적인 언어로 일상 사물을 그려내면서 조화와 타협이라는 삶의 이치를 생각하게 하는 통찰력의 시이다.
조승래 시인의 많은 시들에서 시인의 시선은 내면으로 향해 있다. 시인은 이 내면의 시선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본다.
또 하늘을 오래 보았습니다
파란 허공 아래 구름이 떠다니고
마른 잎 날다가 착륙하는
그 틈새로 잠자리들이 피해 다닙니다
만 개의 카메라로도 다 찍을 수 없는
넓이와 높이의 하늘에
가득 찬 얼굴이 있습니다
저세상으로 가신 어머니의 얼굴입니다
젖은 눈으로 보아야 잘 보이지만
초점이 잘 안 잡혀
손수건으로 눈 비비기를 수십 년,
참 오래된 하늘보기 습관입니다
- 「오래된 버릇」 전문
이 시는 상실과 기억의 층위를 더듬는다. 시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어머니를 추모한다.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곳에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어머니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그리움이 반복되어 일상적인 습관이 되면 그것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추모의 염은 습관 속에서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추구하고 추모하는 행위를 습관적으로 하고 만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 가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신하고, 일 년에 한 번 제사 지내는 것으로 조상의 은혜를 더는 고마워하지 않는다. 시인은 특별한 의식을 통해 이런 내용 없는 관습적 행위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것은 하늘 보기이다. 시인이 “초점이 잘 안 잡혀” 희미해진 눈을 손수건으로 비벼서라도 하늘을 분명히 보고자 한다. 이는 이 애도의 의식 속에 깃든 진실한 마음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 생생하게 그려진 하늘의 모습을 감각적 언어로 마음속에 단단히 새겨넣는다. 이 시의 1연에서 어머니가 그리워 쳐다본 하늘에 있는 구름과 잠자리의 모습을 구태여 강조하여 보여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긍정의 세계관과 수평의 상상력
조승래 시인의 시들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삶에 대한 든든한 긍정적 자세이다. 시인은 이 긍정의 언어를 통해 강퍅한 세상을 견디고 타인의 삶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긍정적 세계관은 그의 시에 등장하는 시간에 대한 관념 속에서 잘 확인된다. 그의 시들에서 시간은 늘 중요한 배경이자 화두이다. 가령 다음 시를 보자.
사방천지 이어진 철로 위
종착역에 가 보면 역은 또 있고
고향역 저만치 두고도
역마살 무거워 갈 수가 없네
내 배역은 아직도 진행형
어느 간이역도 세울 수 없네
- 「진행형」 전문
기차역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에는 우리네 삶은 계속되는 여정이며, 종착점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시인 역시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머물 수 없는 존재로서, ‘역마살’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자로 등장한다. 이 시에는 그런 시인의 내면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어느 간이역도 세울 수 없네”라는 한탄은 머물 수 없어 안식할 수 없다는 자조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시인이라는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진행형”이라는 제목을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아직 끝나지 않는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으로 무거운 역마살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시인은 왜 가지 못하는 것일까? 시인에게는 안주보다는 정처 없는 유랑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머물 곳 없는 피곤한 삶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진행형”으로 살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긍정적인 인생관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 시는 이 공존의 정신을 수평적 이미지로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승강기에 25층, B1 층 위치 표시등이 켜진 새벽
늦은 귀가와 이른 출타를 한 사람들이 있음을 추측하며
곤충도감 개미집 단면도에서 본 것과 대칭형 구조의
아파트를 비교해 본다.
지하에서 지면으로 나온 개미와 지상에서 지면으로 나온 사람들
서로의 만남이 쉽지 않은 겨울이지만
누구나 수평에 등을 댄 채 잠들거나 깨고
그 익숙함으로 세상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 아니 좋은가,
햇살이 평평하게 찾아오는 지상의 시간에
층마다 등을 펴고 쉴 수 있는 공간
수직의 이동에서 멈추어 볼 만한 수평이 있으니
아니 그러한가,
생사 불문하고 수평은 등 뒤를 쫓아다니고
누군가의 등이 되려는 등나무가
제 등 비틀어가며 가는 그 너머 또 수평이 있으니
- 「수평에 쉬다」 전문
우리는 수직의 상승을 꿈꾸며 산다. 출세하고 권력을 획득해 높은 위치에 올라서고 아파트나 빌딩도 높게 지어야 성공이고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그 높은 수직의 아파트 공간에서 편리하고 부유한 삶을 꿈꾼다. 그래서 경쟁을 하고 남을 누르며 밟아서야 한다. 이 수직적 사고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우리 모두를 갈등 구조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시인은 생각한다. 아파트나 개미집이나 모두 삶의 공간이나 쉼의 공간은 다 수평이라는 것이다. 수평의 공간에서 쉬기 위해 우리는 살고 있고. “등 비틀어가며” 자라도 결국은 수평을 유지하여 누군가의 등이 되는 등나무처럼 살아가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임을 시인은 역설하고 있다. 인생은 수직적으로 움직이지만 종국은 모두 수평에서 쉰다는 인생의 평등함을 받아들이는 긍정적 세계관을 이 시에서 엿볼 수 있다. 결국, 이 수평은 영원한 쉼이라는 죽음마저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이기도 하다.
4. 맺으며
이 시집의 시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믿음 위에서 서 있다. 그것은 “사유하는 삶이야말로 살아 있는 삶”이라는 깨달음이다. 시인이 다루는 사물, 감정, 관계, 시간, 언어 모두가 삶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재료이며 또한 화두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모두를 통해 독자에게 ‘깊이 있는 삶’ 즉 사유하는 삶을 살기를 권유한다. 어쩌면 조승래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행위는 곧 ‘삶을 사유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음 시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제 몸만큼 제 마음만큼 쓰다가 쉬었다가
다시 이 세상 원고지 위에 긁적이는 그 어느 존재들도
시詩를 다 쓰더라고 굳이 말하는 이는 없었다.
멈추었으면 삶이 아니다.
삶은 멈추지 않는다.
- 「절필은 없다」 부분
삶이 계속되는 한 절필은 없다. 시인에게 시는 삶의 이유이고 삶 자체이기도 하다. 자연의 미물도 끊임없이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삶은 멈출 수 없고 글도 멈출 수 없다. 시인은 존재의 흔적을 남기며 계속해서 ‘삶의 시’를 써 가고자 한다. 그 아름다운 여정을 우리는 이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생생한 시인의 육성을 마음속으로 듣는다. “쓰지 않으면 삶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