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숙제’를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탁구’를 치듯,
서브도 스트로크도 안 되지만 다 괜찮아!
주인공 고민수는 유치원과 학교가 있는 대단지 아파트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낡고 오래된 빌라의 꼭대기층으로 이사를 한다. 그리고 아빠가 사라진다. 아무런 예고도 설명도 없이 이상한 나라에 뚝 떨어진 앨리스처럼 모든 게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 한하호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이 자꾸만 쌓여 가던 고민수의 삶에 같은 반 친구인 윤민수가 탁구공과 함께 쑥 들어온다. 뒤에서 2등인 고민수와 앞에서 2등인 윤민수는 이름만 같을 뿐 그동안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어느 날 등굣길에서 발견한 흰 공, 그리고 그 흰 공을 따라 들어간 탁구장에서 고민수의 가라앉아 있던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전까지는.
“아빠한테 나는 숙제거든. 아직 풀지 못한 숙제. 내가 어떤 답으로 돌아올지 모르는데 그 숙제를 어려워하는 것 같아.”(119쪽)
차갑고 냉정해 보이던 윤민수의 무덤덤한 고백과 함께 내내 외면하고 있던 고민수의 숙제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둘은 탁구를 치듯 서로의 세계를 주고받으며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 2.7그램의 탁구공이 깃털보다 가볍게 떠올라 때때로 엄청난 속도와 파워로 날아오듯, 두 민수는 자기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각자의 숙제를 시작한다.
“그냥 쳐요. 누군가는 이기는 게임일 테고 누군가는 지는 게임일 테니까요.”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정직한 ‘1점’의 세계를 만나다
윤해연 작가의 신작 『민수의 2.7그램』은 한 소년이 탁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고수와 하수, 부수로 구분되는 탁구클럽에서 고민수는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며 성장해 간다. 서브도 스트로크도 안 되지만 언젠가 강력한 스매시 한 방으로 깊숙하게 공을 찔러 넣을 순간을 꿈꾸며 천천히, 신중하게 똑딱똑딱. 묵묵히 곁을 지키며 언제든 몇 번이든 랠리를 해 줄 친구가 있으니 외롭지 않다.
종이보다 가벼운 2.7그램짜리 흰 공으로 가로 152센티미터 세로 274센티미터 테이블 안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 장외 홈런으로 여러 점을 내거나 공 하나로 두 명을 죽이는 병살이나 도루 같은 속임수는 없다. 잘 치든 못 치든 너와 내가 공평하게 한 번씩 공을 칠 수 있다. 오로지 정직한 1점만이 존재하는 세계다. 그러니까 고수에게도 하수에게도 1점은 공평하게 주어진다. (29쪽)
이 작품에서 탁구는 단순한 스포츠에 머물지 않는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정직한 1점’을 차곡차곡 쌓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보편적 삶을 은유한다. 주인공인 민수들과 명지탁구장의 관장님, 관장님을 찾아온 비밀스러운 분위기의 이름 없는 고수, 가장 구석진 곳에서 모두를 살피는 7탁의 현자, 그리고 자신만의 숙제를 하는 중인 두 민수의 아버지들마저도 그 세계에 속해 있다. 결코 거저 얻어지는 법이 없는 이 ‘1점’의 세계를 두고 작가는 말한다. 그냥 한번 쳐 보라고, 조금은 가벼워져도 괜찮다고.
탁구 소설의 외피를 쓴 이 따듯하고 다정한 소설이 문득 탁구대 앞으로 독자들을 이끌게 되길, 똑딱똑딱 소리와 함께 가슴 뛰게 하길 기대해 본다. 고민수가 처음 탁구장에 들어선 그 순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