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가 도쿄국립박물관으로 향하는 이유
저자는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15개 현(도/도/부 포함) 26개의 건축물을 살펴본다. 이 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도 있고, 새로운 공법으로 지은 첨단 건물도 있다. 또한 공공을 위한 건물도 있고, 상업적 용도의 건물도 있다. 이 다양한 건축을 두루 살피기 위해, 저자는 네 개의 주제를 채택한다.
첫 번째 주제는 ‘서로 다름’이다. 서로 대립되는 혹은 조화를 이루는 여덟 개의 개념 쌍에 빗대 일본 건축을 바라보며, 일본의 건축가(현대의 유명 건축가든 이름을 남기지 않은 옛 기술자든)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건축을 했을까를 묻는다. 먼저 대비시킨 것은 일본의 두 고대 문명, 조몬과 야요이. 섬세하고 절제되어 있되 경직되고 정형화된 일본적 미(美)를 ‘야요이적인 것’으로 보면서 ‘조몬적인 것’, 즉 강한 야성미와 역동성 그리고 생명력을 되살리자는 전후(戰後) 일본 문화예술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건축가 시라이 세이이치(白井晟一)의 건축을 사세보(나가사키)에서 확인한 저자는 ‘일본적 미’의 또 다른 예시로 교토의 료안지와 킨카쿠지(금각사)를 비교한다. 한눈에도 화려한 킨카쿠지의 금각과 오래 관조하게 만드는 료안지의 돌 정원 모두 일본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인데, 그중 어떤 아름다움에 끌리는지는 결국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할 것이다.
두 번째 주제는 ‘일본의 역사 속 일본 건축사’다. 거의 30년 터울로 지어진 도쿄국립박물관의 네 개 전시동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09년에 개관한 효케이관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시대정신으로 서구화와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당대 일본을 보여주며, 1938년 지은 (현재의) 본관은 탈아입구에서 탈구입아(脫歐入亞)로 진로를 변경하고 전통을 과시하려 했던 일본의 충만한 자신감을 반영한다. 1968년에 개관한 동양관은 보편으로서의 모더니즘과 특수로서의 일본성을 어떻게 결합하느냐를 고민하던 시대정신에 대한 건축적 대답이며, 1999년에 개관한 막내 호류지보물관은 더 이상 보편과 특수의 대비 또는 일본적 서사 등에 구애받지 않는 일본 건축의 수준을 보여준다. 도쿄국립박물관은 자체로 건축박물관이자 역사박물관인 것이다.
일본 근대 건축가 계보의 맨 위에 단게 겐조(丹下健三)는 일본 건축사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의 건축물-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 가가와현청, 국립 요요기 실내종합경기장-을 통해 건축이 시대적 요구-패전의 피해 극복, 전통의 현대적 해석, 국력의 과시-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설명한다. 이 ‘시대적 요구’가 어떤 의도를 품고 있을 때 건축은 프로파간다의 도구가 되기도 하는데, 그 극명한 예를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의 공간 시퀀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건축은 어떤 일본을 담고 있을까?
세 번째 주제는 ‘지역’이다. 아열대의 섬 오키나와부터 설국(雪國) 니가타까지, 일본의 자연 및 지역성은 건축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을까? 나고시청(名護市役所)에서 콘크리트블록이라는 몰개성의 건축 재료를 남국의 자연에 맞게 풀어낸 동시에 오키나와의 전통과 접목시킨 건축가들의 고민을 엿보는 한편, 니가타의 큰눈에 버티기 위해 오래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목조의 뾰족지붕이 철근콘크리트조의 평지붕으로 바꾸고 있는 풍경에서 자연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건축과 기술을 성찰한다.
건축이 지역을 받아안는 방식이 그저 풍경에 안착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한국 건축물도 여럿 설계한 구마 겐고(隈研吾)가 (아직 덜 유명했던 시절) 설계한 도치기현의 작은 뮤지엄들을 찾는다. 해당 지역에서 생산된 볏짚과 돌 등을 건축 재료로 적극 끌어들인 소박한 뮤지엄들은 건축이 지역에 녹아드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네 번째 주제는 ‘만남’이다. 건축물은 만남이 이뤄지는 공간이자 다양한 만남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작은 운하 위에 세워진 나가사키현미술관의 다리는 기능적으로는 운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지만, 또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의도하고 있기도 하다. 서로 다른 문명의 만남은 새로운 양식을 만든다. 하코다테의 의양풍(擬洋風) 건물 ‘구 하코다테공회당’은 그림과 사진으로만 서양의 석조건축물을 접한 일본의 목수들이 그 외양만 흉내 내 만든 과도기적 결과물이다. 저자는 이 의양풍 건물을 ‘짝퉁’으로 보지 않고,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머뭇거림과 하이브리드적인 모습으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하이브리드’는 하코다테보다 먼저 서양을 만난 나가사키 데지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데지마의 네덜란드 체류 상관원들을 위한 거주지, 사무 공간, 접대 공간, 식당 등은 대부분 나무로 구조의 골격을 만들고 다다미로 바닥을 깔았고 지붕은 기와를 얹었는데, 내부는 서양식 입식 가구들로 채워져 있다. 이런 이질적인 공간-생활방식의 동거는 이후 나타날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를 먼저 보여준 것이 아닐까.
프리츠커상보다 중요한 것
1979년에 시작되어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이 있다. 2025년까지 매년 수상자를 발표해온 이 상에서 일본은 총 8회, 9명의 수상자(2010년 공동 수상)를 배출한 최다 수상국이다. 이 책에 소개된 건축물 중에도 이 프리츠커상 수상자의 작품이 여럿 있다. 그러나 저자는 대단한 건축가의 대단한 성취를 분석하기보다 다양한 건축물이 어떤 삶의 틀이 되고 있는지를 살핀다. 이렇게 살고 싶으면 이렇게 생긴 집을 짓고 저렇게 살고 싶으면 저렇게 생긴 집을 지으니, 건축을 관찰하면 삶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에게 여행은 건축가로서의 공부이기도 하다. “일본 건축을 통해 동시대를 살고 있는 다른 삶을 본다. 그로써 내(우리) 건축을 비춰보고, 내(우리) 건축이 있는 자리를 더듬으며, 더 나아가 내(우리) 건축이 나가야 할 바를 가늠해”보기 때문이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많은 문학과 영화, 역사적 사실과 저자 자신의 일상을 엮은 이야기가 저자가 살필 건축과 어우러진 이 책은, 여행기이면서도 역사에 대한 성찰이고, 건축 비평이면서도 삶에 대한 에세이다. 건축에 관심 있는 독자는 물론, 일본 여행에 깊이를 더하고 싶은 독자에게 권한다.
이 책에서 살펴본 건축물을 지은 사람들
시라이 세이이치白井晟一
막스 힌델Max Hinder
구마 겐고隈研吾
알도 로시Aldo Rossi
단게 겐조丹下健三
가타야마 도쿠마片山東熊
와타나베 진渡辺仁
다니구치 요시로谷口吉郎
다니구치 요시오谷口吉夫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이토 도요伊東豊雄
팀 주TEAM ZOO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그 외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목수 및 기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