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깊이와 사색의 아름다움 발견
박상분 수필가의 작품은 삶의 일상적 순간들 속에서 정서적 깊이와 사색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강점을 지닙니다. 이번 수필집 ‘『작은 방에서의 화해』에 실린 4편만 골라 수필의 색깔을 들여다봅니다.
‘산과 케렌시아’에서는 자연 속에서 자아를 회복하는 여정을 섬세하게 묘사했고, ‘그 풍경 안에 머물고 싶다’에서는 가을 들녘의 코스모스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떨림을 포착했습니다. 이처럼 수필가는 자연이나 주변 풍경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삶의 철학과 감정을 투영하는 정서적 공간으로 확장시키며,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끌어냅니다.
또한, 박상분 수필가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미묘한 결을 섬세하게 다루는 데 뛰어납니다. ‘탯줄’에서는 모성과 자식 간의 보이지 않는 정서적 유대를 진심 어린 서사로 풀어냈고, ‘우리의 축배’에서는 부부 사이의 잔잔한 감정 흐름과 중년의 허전함을 따뜻한 시선으로 조명합니다. 일상의 평범한 장면을 통해 인간관계의 본질을 사유하게 만드는 글은, 과장되지 않은 문체 속에서도 진한 울림을 남깁니다.
박 수필가의 글은 삶의 언저리에 놓인 감정들을 정직하게 바라보며, 그 안에서 의미와 위로를 찾아내는 서정적 산문입니다. 감정의 절제 속에서도 순간순간 피어나는 통찰과 회상의 힘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덤덤하면서도 따뜻한 문장, 자연과 사람을 연결 짓는 감성적 시선은 이 수필가만의 진정성과 성찰을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산과 케렌시아,
섬세한 감수성과 깊이 있는 통찰
‘산과 케렌시아’는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교감시키는 섬세한 감수성과 깊이 있는 통찰이 돋보입니다. 글쓴이는 초겨울 산의 쓸쓸하면서도 청명한 풍경을 시적인 언어로 포착하며, 산길을 걷는 감각적 체험을 내면의 정서와 연결시킵니다. 특히 "산은 거기 있었고, 나는 결삭은 친구를 다시 만난 듯"이라는 구절은 오랜 시간 쌓인 산과의 관계를 감동적으로 되살리며, 독자에게도 자연과의 친밀한 유대를 환기시키는 힘을 가집니다.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장점은 ‘케렌시아’라는 개념을 산행의 경험과 절묘하게 연결한 점입니다. 투우장에서 소가 몸을 회복하는 장소인 케렌시아를 인간의 마음을 회복하는 내면의 성소로 확장하면서, 산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정서적 치유의 장소’로 전환시킵니다. 이 개념은 단지 이국적 소재의 도입에 그치지 않고, 산속의 오솔길과 같은 일상적 체험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수필의 주제를 한층 풍요롭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수필 전반에 흐르는 글쓴이의 삶의 연륜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은 독자에게 잔잔한 울림을 남깁니다. 과거 산행의 추억에서부터 무릎 통증을 겪는 현재의 몸 상태까지 솔직하게 풀어내면서, 산이 단순한 취미 공간이 아닌 존재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온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케렌시아’를 돌아보게 하고, 일상에서 자기를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을 찾도록 이끄는 정서적 힘을 지닙니다.
그 풍경 안에 머물고 싶다,
군더더기 없이 맑고 섬세
이 수필은 계절의 감성과 자연의 풍경을 정서적으로 섬세하게 포착하며, 독자의 마음을 조용히 물들입니다. 특히 가을바람을 타고 오는 코스모스의 존재감을 통해, 자연이 주는 정서적 위안과 사색의 여유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을엔 누구나 숲을 거닐다 길을 잃어볼 일이라는데, 코스모스 숲에서는 길을 놓쳐도 좋으리라”라는 마무리 문장은 글 전체의 서정적 정조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며, 가을 풍경과 내면 감정의 조화를 우아하게 완성합니다.
글쓴이는 단순히 코스모스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꽃에 얽힌 개인의 기억과 정서를 세심하게 풀어내며 풍경과 감정의 일체감을 이루고 있습니다. 절 뒷마당에서 우연히 만난 코스모스 한 무더기, 어린 시절 시골길을 물들였던 코스모스 물결, 축제에서의 실망 등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 경험이 잔잔한 회상으로 엮이며, 독자에게도 저마다의 코스모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감정의 울림을 전달합니다. 꽃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과 감정의 잔상을 엮어내는 솜씨가 빼어납니다.
또한, 이 수필의 언어는 군더더기 없이 맑고 섬세하여,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풍부한 감동을 줍니다. “가녀린 고것들의 몸짓에서 애잔함이 묻어난다.”와 같은 표현은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연에 깃든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있어 수필의 정서를 더욱 깊이 있게 합니다. 일상 속 지친 감성을 가을 풍경에 기대어 정화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자질구레한 현실을 잠시 벗어나 사유 속에 머물고 싶은 바람이 고스란히 담긴 이 글은, 독자에게도 "그 풍경 안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선물합니다.
탯줄,
인생의 근본적인 관계와 감정을 되짚다
‘탯줄’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정서적 유대를 ‘탯줄’이라는 은유를 통해 깊이 있고 감동적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글쓴이는 단순한 생물학적 연결을 넘어, 부모의 걱정과 직감, 그리고 자식을 향한 사랑이 마치 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탯줄처럼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특히 수능시험 날 아들의 한기를 온몸으로 느꼈다는 대목이나 입대 후 우편함을 지켜보며 편지를 기다리는 장면은, 부모의 감정이 얼마나 실시간으로 자식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또한, 이 수필은 글쓴이 개인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친정어머니 세대의 이야기로까지 감정의 흐름을 확장하여, 모성애의 전통성과 보편성을 감동적으로 조명합니다. 박하 꿈을 통해 아들의 병을 직감하고 면회를 서두르는 어머니의 모습은,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는 ‘모정의 예지력’과 같은 신비로운 감각을 상징하며, 독자에게 인간관계 중 가장 깊고 오래된 연대가 바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임을 다시금 일깨웁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언급된 “정신적인 탯줄”이라는 표현은 수필의 전체 주제를 집약하며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시간이 흘러도, 나이가 들어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이 탯줄은, 이성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정서적 교감이며, 이를 통해 글쓴이는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사랑의 본질을 조용히 강조합니다. 전반적으로 이 글은 단순한 회상을 넘어, 인생의 근본적인 관계와 감정을 되짚게 하는 진솔하고 울림 있는 수작입니다.
옥토에 내리는 비,
일상의 균열을 감성적 연대와 유쾌한 방식으로 회복
‘옥토에 내리는 비’는 부부의 소박한 일상과 정서적 교감을 따뜻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밤늦게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 나누는 맥주 한 잔에서부터, 공원에서 별을 바라보며 흘러간 추억을 이야기하는 장면까지, 작가는 지극히 평범한 풍경 속에서 진한 감정의 울림을 끌어냅니다. 특히 늦여름의 선선한 바람과 함께 녹아드는 부부의 대화는, 삶의 시간 속에서 다져진 정과 신뢰를 고스란히 담아내며 독자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줍니다.
글의 가장 큰 미덕은 ‘옥토’라는 상징을 통해 부부의 삶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한 점입니다. 단순한 음주의 순간이 아니라, 외로움과 권태, 세월의 무게를 함께 이겨내는 ‘의식’으로서의 술자리를 통해, 작가는 결혼 생활의 본질적 가치-함께 있는 것, 자체의 의미를 일깨웁니다. 특히 “그와 내가 마시는 술은 옥토에 내리는 비가 되어 우리 부부에게 행복의 꽃을 피우게 할 것이다”라는 문장은 상징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부부의 삶을 축복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한, 이 수필은 중년 이후의 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며, 빈둥지 증후군이나 일상의 고독감을 진심 어린 시선으로 담아냅니다. 하지만 그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작가는 술 한잔과 나눔의 순간으로 그 허허로움을 따뜻하게 메웁니다. 일상의 균열을 감성적 연대와 유쾌한 방식으로 회복해 가는 이 부부의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일상의 소중함과 관계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며 오랜 여운을 남깁니다.
위 네 편의 수필은 일상과 자연, 가족과 정서의 깊은 결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내며 독자에게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산과 케렌시아’에서는 자연 속에서 자신을 회복하는 내면의 성소로서의 산을 그려내고, ‘그 풍경 안에 머물고 싶다’라는 가을의 정서와 코스모스를 통해 덧없고도 아름다운 감정을 포착합니다. 두 작품 모두 자연이라는 배경 속에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절묘하게 겹쳐놓으며, 서정적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한편 ‘탯줄’과 ‘옥토에 내리는 비’는 가족과 부부 사이의 보이지 않는 정서적 연결을 중심으로, 인간관계의 본질에 대해 사려 깊게 성찰합니다. ‘탯줄’은 모성과 자식 간의 강인한 정서적 유대를 통해 삶의 뿌리를 되새기게 하며, ‘옥토에 내리는 비’는 나이 들며 찾아온 외로움을 부부가 함께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 따뜻한 연대와 회복의 의미를 전합니다. 이처럼 네 편의 수필은 각기 다른 삶의 풍경 속에서 진정성 있는 시선으로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며, 읽는 이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선물하는 작품들입니다.
-해드림출판사 이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