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 이후 한국 민주주의를 재설계하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적대 정치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진영 싸움-대통령과 국회의 대립-비상계엄-탄핵-대통령 파면’ 등의 일련의 사태는 다시 진영 싸움으로 이어지며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적대 정치 청산과 개헌을 말하다: 한국 민주주의 구출하기》는 이런 한국 정치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한 책이다. 학계와 시민이 함께 지혜를 모아 건강한 민주주의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한림대 도헌학술원에서 주최한 ‘한국 민주주의 구출하기: 적대 정치의 청산과 개헌 제안’ 심포지엄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 정치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학술적으로 분석하고, 그 현실적 해결책으로서 87년 헌법 체제의 전면적 개정을 주장한다. 이제는 생명을 다한 87년 헌법을 전면 개정하지 않고는 적대 정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이 이 책을 집필한 공저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저자들은 “민주주의는 현재 한국 정치구조 속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고 진단하며, 적대 정치를 반복하는 현 체제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정치구조의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단순한 학술적 논의를 넘어, 실제 개헌 담론을 형성하고 정치개혁과 헌정체제 개편이라는 실천적 과제를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던진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대통령제의 비정상화, 정당정치의 파행, 국회 운영의 비효율 등 한국 정치 전반에 걸친 고질적 문제를 헌정체제 개편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단순한 체제 비판에 그치지 않고, 현실 정치를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대한민국 대표 석학 6인이 그린 정치개혁과 개헌의 로드맵
이 책의 저자 6인은 정치학자, 법학자, 사회학자, 행정학자로서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으로 손꼽히는 인물들이다. 또한 현실 정치에 대한 활발한 저술과 강연으로 공론장을 이끌고 정부 정책 설계를 자문하는 ‘행동하는 지식인’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러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오늘날 한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진단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개혁과 개헌의 해법을 제시한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대통령제의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며, 통치구조 개혁과 함께 정당정치를 다당제로 전환하는 정치개혁을 제안한다. 오늘날 계엄과 탄핵 등 정치적 파국의 원인이 대통령과 국회 간 힘겨루기와 야당의 제도적 자제가 사라진 데 있다고 분석하며, 다당제를 통해 정당 간 논의와 타협, 양보를 유도함으로써 양극화를 완화하고 연합 정치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정건 경희대 교수는 한국 정치와 미국 정치를 비교하며 인물 중심 정치를 지양하고 양극화를 완화하려면 다각도의 접근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즉, 선거 주기 및 제도의 재검토, 상임위원회 중심의 국회 운영 분권화 및 의원 선출 방식 재편을 통한 중도파 확충, 본격적인 정책 계파 정치의 활성화를 통한 정당의 민주적 공고화 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는 승자독식 구조의 폐해를 지적하며 분권과 협치를 지향하는 개헌의 방향을 제시한다. 또한 민주 헌법의 양대 축으로 국민주권과 대의제를 구현하는 민주주의 정부형태와 정치행위자들의 상호 존중을 전제하는 관용과 공존의 원리를 강조한다.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은 87년 헌법이 생명을 다했음을 전제로 대통령제와 의회제도의 과감한 혁신을 주장한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전통적 지위를 갖고 국무총리가 내각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의회를 단원제에서 양원제로 개편하여 상원의 보수적 성격과 하권의 진보적 성격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재호 태재대 총장(전 고려대 총장)은 21세기 문명변혁기 한국에 요청되는 정부 역할의 변혁을 강조한다. AI 시대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따라 행정/입법/사법 시스템을 재구성하고, 중앙정부와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지방정부와 젊은 세대까지 아우르는 균형 있는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87년 체제의 생성과 해체 과정을 돌아보며 한국 정치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살펴본다. 87년 체제는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협약’을 통해 세워졌지만 이후 정치권은 진영 싸움과 과거 청산, 포퓰리즘적 통치에 몰두하며 민주주의 제도와 정당정치를 약화시키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고 분석하며, 이제 양당제를 넘어 다원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들은 “87년 체제는 정치 현실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며,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정치구조의 전면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 책은 단지 학문적 진단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회생을 공론화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