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사유의 관점과 표현
이 시집의 1부에 실린 시들은 경이로운 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활달하고 자유로운 사유와 상상력을 공여하여 사진과 시가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도록 한다. 기실 이와 같은 창작의 방식은 시 곧 디카시가 미학적 가치를 담보하도록 하는 기본적인 패턴이며, 시인은 애써 윤색하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당초의 목표를 달성한다. 「앤텔롭 캐년」은 사암(沙巖)과 유수(流水)와 일광(日光)의 조화가 빚어낸 놀라운 경관을 포착하고 이 ‘대자연의 얼굴’에 ‘인간의 솜씨’가 낄 자리가 없다고 언표(言表)한다. 그런가 하면 「희망」에서는 다채로운 색깔로 깔린 보도블록을 바라보면서 ‘색동저고리’를 유추하고, 거기에 ‘소박한 행복’의 길을 전제해 둔다.
5-6천만 년 전 용암이 식으며 만들어 낸
무수한 발판과 4만여 개 육각형 현무암
거인의 발자국과 오르간이라는 전설
풍광이 경이로우니 사람조차 신비롭네
- 「거인의 방죽길」 전문
인용된 시는 기이한 바위들로 형성된 해변의 ‘방죽’에 렌즈의 표적을 둔다. 그곳에는 여러 사람의 관광객이 구경을 하고 또 사진을 찍고 있다. 원래 방죽은 물이 넘치거나 치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인공으로 세운 둑을 말한다. 그런데 이 놀랍고 거대한 방죽은 신이 아니면 자연의 솜씨다. 시인이 확보한 과학적 견식으로는 5-6천만 년 전에 용암이 식으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를 두고 ‘거인의 발자국과 오르간이라는 전설’을 수긍한다. 그리고 정작 시적 의미의 생성을 촉발하는 언사는, 풍광이 경이로우니 이에 참예한 사람조차 신비롭다는 데 이른다. 수천만 년의 역사 과정과 오늘의 인적을 한데 묶어낸 기량이 여기에 있다.
언제나 그립고 고운 이름, 가족
“세상에 하나님이 직접 세운 기관은 교회와 가정밖에 없다”라는 표현이 있다. ‘가족’은 그렇게 우리의 권한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며, 동시에 우리 마음대로 잇거나 끊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쩌면 가족이야말로 ‘운명’인지도 모른다. 2부에 수록된 시들은 시인이 삶의 주변에서 만난 자연환경 가운데서도 이 대목에 방점을 둔 경우다. 「부부」는 한 뿌리로 두 몸체를 이룬 오래 묵은 나무와 그 나무가 매달고 있는 푸른 잎들을 담았다. ‘뿌리 깊은 나무’이기에 청청하고 풍성한 잎새를 키웠다고 했으니, 곧 하나의 훈훈한 가족사에 해당한다. 그런가 하면 「속이 빈 나무」는 어둡고 힘든 시절을 견딘 어머니의 상처와 같은 모양의 나무가, ‘사랑’의 치유로 ‘푸르른 가지’를 키웠다는 담화를 불러왔다.
반짝이는 동그란 눈이 닮았네요
사랑이란 보자기로 감싸주며
행복을 엮어가는 우리 가족
봄이 왔나 궁금해 얼굴만 내밀었어요
- 「가족」 전문
참으로 값있는 사진이다. 고목의 균열 사이로 아기 다람쥐 세 마리가 함께 얼굴을 내밀고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순간이 오래 지속될 리 없다. 디카시의 영상을 ‘순간 포착’이라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은 그야말로 단란한 동기간의 정리(情理)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문득 내게는, 내 가족 간에는 이런 순간이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아마도 이 나무 중동 안쪽에 다람쥐들의 보금자리가 있는 듯하다. 시인은 이들의 ‘반짝이는 동그란 눈’이 서로 닮았다고 말한다. 이때의 닮았다는 것은 단순히 비슷하기를 넘어서 혈육의 연분을 부드럽게 확정하는 언사다. 이들이 봄이 왔나 궁금한 것도, 생각과 시선이 동일하다는 공동체적 유대와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가족이다.
또한 시인은 「애기똥풀」을 두고도 ‘이름도 귀여운 봄의 전령’이라 규정하고, 그 이름에 비추어 ‘엄마 사랑’을 기다리며 자란다는 상황을 구성했다. 길섶에 ‘앙증맞게 피어난’ 야생의 풀꽃에서, 또 그 이름에서 가족 사랑의 고운 감성을 소환한 시다.
함께 가는 행로의 소중한 온기
불가에서 말하는 도반(道伴)이란 말은 함께 불도를 닦는 벗을 말한다. 단순한 동료 이상의 관계를 나타내며, 서로의 삶과 수행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는 동기 부여와 상호 성장을 견인하며, 신뢰·소통·공감과 같은 여러 미덕을 생성케 하는 동반자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사람과의 관계 외에도 우리와 함께 가는 길벗으로서 수많은 동물이 있다. 시인의 디카시는 이 지점까지 그 범주와 외연을 넓혀 놓았다. 시의 성장과 더불어 시인 내면의 성장을 동시에 보여주는 지표다. 3부의 시 중에서 「좋은 세상」에서 맑은 물의 부표 위에 올라앉은 거북이들, 그리고 「꿀벌아 조심할게」에서 풍성한 꽃 그림의 손님으로 등장한 꿀벌들이 모두 그렇다.
자식 돌보며 강을 건너는
어미와 아비 코끼리
세상 떠날 때는
혼자 숲속으로 사라진다니
사랑과 이별의 원칙을 아는구나!
- 「지혜로운 사랑」 전문
코끼리 가족이 열을 지어 강을 건너는 풍경이다. 결코 흔한 광경이 아닌데, 시인이 어디서 이 사진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아프리카 여행지가 제격일 듯한데,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시인은 이 한 장의 사진을 바탕으로, 코끼리 일가가 지키는 ‘사랑과 이별의 원칙’에 대해 감탄한다. 이들의 이동에는 어미 아비가 자식을 돌보는 몸짓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더 나아가 세상 떠날 때는 혼자 숲속으로 사라지는 종족 질서의 엄정함을 지킨다는 것이다. 하기로 하면, 동물과의 동행에서도 이토록 배울 바가 많다.
배려와 존중으로 따뜻한 격려
정 세실리아 디카시집 4부를 읽으면, 누구나 한 때 경도(傾倒)되었던 나무 사랑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무는 선량하고 언제나 무죄이며 끝까지 사람과 사랑의 편이다. 시인은 이 문맥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나무에게 배려와 존중의 외경심(畏敬心)을 품는 시인이라면, 항차 사람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가시덤불」은 욕심에 관한 교훈을, 「내면의 힘」은 은인자중(隱忍自重)에의 깨우침을 시의 문맥에 실어놓았다.
색이 좀 다르면 어떠냐
뛰어난 학업 성취 능력에
다양한 문화를 포용해
세상이 더 풍요로워지는데
- 「이민 학생」 전문
인용의 시에 등장한 사진은 온갖 채색의 꽃봉오리가 백화난만(百花爛漫)의 형상으로 미색(美色)을 다투고 있는 판이다. 그 각기의 꽃이 어떤 정체를 가졌는가를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렇게 이색(異色)의 쟁투가 한데 손길을 모았을 때, 거기 화합·혼합·융합의 아름다움이 되살아난다. 서로 다른 얼굴들의 표정이 연합하여 극상의 조화로움을 펼쳐낸 태세다. 사람 사는 세상도 이와 꼭 같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인 듯하다. 시인은 단도직입적으로 ‘색이 좀 다르면 어떠냐’고 묻는다. 다민족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 살면서 인종 차별의 폐해를 목도한 시각으로 하는 말이다. 학업 성취 능력과 다양한 문화가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는 주장에, 이 꽃의 얼굴 만한 증빙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은혜로운 세상살이의 방정식
인간의 구성 분자를 분석하는 방식 가운데 성경의 논리를 따르자면, 몸과 혼과 영의 구분이 있다. 몸과 혼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통어(統御)할 수 있으나, 영은 절대자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이 영 또는 영혼의 지경(地境)이 존재하기에 인간조차 신비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인간은 낮은 자리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일관할 수 있어야, 그 신비의 가치를 향유 할 자격을 얻는다. 이 시집 5부의 시들은 이와 같은 인간의 존재 양식을 잘 체득한 결과로 보인다. 「호국선열」은 Key West 섬에 세워진 브론즈 조각상을 보며 ‘네가 선 땅 지켜준 선조’를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마치 이육사의 시에서와 같은 준엄한 정신주의의 질문이다. 「내 마음속의 불꽃놀이」에서는 송년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우리의 ‘불꽃 같은 삶’을 되돌아본다. 거기에 한 해를 지나온 유형무형의 삶 전체를 결산하는 내면의 산법(算法)이 있다.
산봉우리 밑 옛 마을에서
바다위로 흘러나오는
비발디의 사계절 음악 소리
잠간 얼굴 내민 피아니스트
언니의 미소 띤 모습
- 「흰 뭉개 구름」 전문
이 시는 하늘에 펼쳐진 구름의 형상에서 시인의 삶에 밀착된 유의미한 이미지를 도출한 결과다. 육신의 경계를 넘어 혼과 영의 세계로 진입한 원론주의자들은 종종 자연경관, 특히 하늘의 모형에서 메시지나 계시를 얻는다. 성경이 말하는 ‘구름기둥’(출13:17-22)도 그 한 사례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멀리 갈 것이 없다. 시인이 붙든 하늘의 로열블루와 흰 구름의 심상이 모든 해명을 거절해도 좋을 만큼 우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하늘을 만나기는 그야말로 행운의 날개 위에 올라 있을 때다. 시인은 여기에 옛 마을에서 바다 위로 흐르는, 비발디 〈사계〉의 음악 소리를 펼쳐 둔다. 그리고 ‘언니의 미소 띤 모습’까지 찾아냈으니, 한 폭의 사진에 매우 다양하고 많은 삶의 족적을 결부했다.
미국 동부에 위치한 세계의 수도 워싱턴에서, 디카시에 진심인 정문자 세실리아 시인은 첫 디카시집 『내 마음속의 불꽃놀이』를 통해 일상의 주변에서 놀라운 영상을 찾아내고, 여기에 잘 다듬어진 시적 언술을 부가하는 시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시인의 자유로운 사유와 표현의 시가, 서정시의 미학적 가치를 높게 포괄하고 있다. 그의 디카시로 쓴 은혜로운 세상살이의 방정식을 읽으며, 독자들의 마음속에도 “형형색색으로 피고지는 불꽃 같은 삶”의 파문이 일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