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평론가의 시집 해설에서 일부를 발췌하였음)
#1 - 한 정민 시인의 삶은 일제 강점기 - 광복 - 6ㆍ25전쟁 근대화 과정 급속한 사회 변화 같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투영하면서 어려운 고비를 견뎌온 의지의 노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 연배의 시니어들이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으로 경험한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민한 감성으로 인하여 훨씬 깊은 굴곡과 울림으로 우리 현대사의 증인으로 살아온 셈이다.
그간 발간한 여러 권의 시집에서도 시인은 각기 특색 있는 목소리로 사회와 자아, 운명과 나, 자신과 또 하나의 자신과의 길항관계와 종국에 이르게 되는 대승적 화해의 길을 노래하였다.
여러 병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지만 시에 나타난 시인의 일상은 매우 건전하고 성실하다. 건실한 나날의 삶은 스스로 정한 규칙과 합리적인 시간 운용 그리고 게을러짐을 멀리하는 몸에 밴 부지런함으로 구체화된다.
#2 - 한 정민 시인은 파월 장병, 지금의 표현으로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로 근 60년 전 머나먼 베트남에 파병되어 생시를 넘나드는 여러 전투에 참전하고 귀환한 유공자다. 젊은 세대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터이지만 당시 1960~70년대 베트남 파병에 관한 여러 사안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대목을 이룬다. 베트남전쟁 참전의 기억을 담아 쓴 작품들은 반세기 전 아득한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으로 우리를 이끈다.
#3 - 작품 「어머니의 눈물」, 「퀴논의 첫날밤」, 「연화(煙火)」, 「졸음」 그리고 「못다 부른 노래」는 베트남으로의 출국 과정에서부터 현지 주둔과 전투를 거쳐 귀국길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기억과 감성의 흔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몇몇 문인들이 당시의 추억과 감회를 노래한 시집을 오래전에 발간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빛바랜 역사의 한 장으로 편입되어 가는 듯하다. 베트남 참전의 공과와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양국의 민간 차원에서 심각한 담론으로 진행 중이지만 어느덧 60년이 되어가는 시간적 거리감으로 인하여 아쉽게도 답보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대 초반 젊은 병사가 느꼈을 생소한 이국 풍광과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한 당시 전황 그리고 그로부터 기나긴 시간이 지난 이즈음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베트남전쟁 파병의 성과와 남은 과제 같은 화두를 문학적 기록으로 갈무리하는 작업은 의미 있다 할 것이다.
#4 - 대체로 공포와 회피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죽음에 대한 평정한 인식은 시인의 사유와 감성이 긍정과 낙관에 힘입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년 이후 죽음에 대한 인식은 개인의 삶의 방향과 질에 직, 간접의 영향을 끼치므로 특히 중요한 관건이 된다. 생애를 통하여 여러 고비를 넘기면서 자칫 비애와 낙담의 노년에 접어들 수 있는 요인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삶과 가치관은 밝고 낙천적이다.
#5 - 어둠과 고뇌, 아픔이 삶의 길목에서 끊임없이 자극을 주면서 부정과 염세의 골짜기로 시시각각 유혹하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한 정민 시인이 지나온 시간은 바로 우리 사회가 빈곤에서 풍요를 향하여 달려온 혼돈과 격동, 성취의 연대기이기도 하다. 성실한 생활인으로,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해온 경륜에 이제 시인의 사명, 언어 예술가로서의 역할이 더해지면서 한 정민 시인은 슬픔 너머의 기쁨, 격랑과 풍파가 그친 뒤의 평화로움을 경험한 사람이 노래할 수 있는 당위의 시학을 구현하게 되었다. 당위는 지금 존재하면서 조건이 없어야 하고, 아울러 미래에 있어서도 있을 것에 대하여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내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