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그립니다
화가 김제민의 그림에는 주로 식물이 등장한다. 화려한 꽃이나 위풍당당한 모습의 나무같이 ‘잘생긴’ 식물이 아니라, 갈라진 벽이나 보도블록 틈에서 기어이 솟아오르는 풀이나 뿌리 뽑혀 바싹 말라 버린 풀 같은, 그러니까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온갖 ‘잡풀’이 주인공이다.
‘풀’을 그린 지 20여 년. 하고많은 흥미로운 것 중에 그는 왜 식물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미대 4학년 때 졸업 작품 주제를 고민하며 집 근처 뒷산에 갔다가 만난 다양한 풀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은 그를 ‘풀 그리는 화가’로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렇게 왠지 모르게 이끌려 사진에 담은 풀숲 풍경은 졸업 미전에 출품한, ‘이종(異種)’을 의미하는 ‘Heterogeneous’라는 제목의 대형 목판화 작품으로 태어났다.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 어머니와 전북 김제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작가는 어릴 때부터 ‘정체성’ 문제를 남들보다 더 많이 고민하며 성장했다. 그는 졸업 미전에 자화상과 ‘Heterogeneous’라는 작품을 나란히 걸었는데, 서로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 두 작품이 사실 자화상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어쩌면 풀숲에서 “서로 다른 것들이 섞여 있어서 더 좋고 더 아름다운 나의 모습”을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로 화가 김제민은 자세를 낮추고 우리 주변의 작은 생명들에게 시선을 맞추며 그림 그릴 ‘특별한’ 대상을 찾기 시작했고, 풀(잡초)의 모습에 나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제초제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단일경작지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는 풀밭, 학교 캠퍼스에서 가차 없이 제거된 잡초, 위해식물 또는 생태계교란종이라 규정된 풀들, 어쩌다 보니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지역에 가서 뿌리 내린 외래종 등 김제민의 그림에 등장하는 풀들이 모습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게 중요한 가치인 ‘다양성과 공존’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풀의 시선으로 상상합니다
강제로 살던 곳에서 ‘아웃’ 당한 잡초가 인간들에게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각오로 러닝머신 위를 달리거나 덤벨을 들며 체력 단련을 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갖가지 무술 동작을 연마하기도 한다. 때로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신나게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달리기도 하고, 커다란 가방을 끌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작가의 그림 속 식물들은 사람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내가 만약 간신히 터 잡은 곳에서 뿌리 내리고 잎을 냈는데 한순간에 생을 마감해야 하는 풀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스스로 이동하기 쉽지 않은 식물도 원하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할까? 풀은 무엇을 제일 두려워할까? 작가는 풀의 시선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상상한 것들을 표현해 본다. 때로는 묵직한 사회적인 이슈를 그림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의인화한 풀이 등장하는 김제민의 그림은 명랑만화의 한 컷처럼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다. 그림 앞에서 저절로 피식 웃음이 나오게 만든다. 작가는 “식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감정 이입해 보는 일이야말로 ‘비인간’ 존재와 공감하고 소통하기 위한 작은 노력”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좀 더 작가의 유쾌하고 엉뚱한 상상에 동참해 작품과의 거리를, 식물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기를 바란다.
자연이 그린 그림을 따라 그립니다
작가에게 풀은 의미 있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조형적으로도 흥미로운 대상이다. 풀은 콘크리트 건물, 아스팔트 도로 등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어진 환경에 맞게 나름의 기발한 생존 전략을 동원해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제멋대로 솟아나고 뻗어 나가는 것 같지만, 법칙과 질서 속에서 움직인다. 압도적으로 강할 것 같은 인공적인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나가고 경계를 넘나들며 움직인다. 작가는 그런 모습을 두고 “풀이야말로 자연의 완벽한 드로잉이고, 나는 그저 그것을 따라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밟히고 뽑히는 것이 일상인 풀들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보잘것없고 쓸모없어 보이는 존재지만, 작가는 그림을 통해 이 연약한 존재가 살아가는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생명력 앞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작가가 그림으로 표현하고 글로 써 내려간 ‘원더-풀-월드’는 늘 다니는 길가에서, 가끔 찾아가는 숲에서 서로 상생의 방법을 모색하며 살아가는 풀과 나무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다양해서 아름다운 세상, 어울림과 공존의 세상을 꿈꿔 보라고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