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훈정동 종묘 만세시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독립운동가
김순호는 1902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황해도는 한국 기독교의 요람이라 불렸을 정도로 당시 기독교의 성장세가 두드러진 곳이었다. 김순호는 재령 동부교회 장로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 재령에서 명신학교를 졸업한 후 1916년 서울 정신여학교에 입학했다. 3·1운동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세브란스병원간호부양성소에 입학해 간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일어난 훈정동 종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돼 극심한 고문과 수모를 겪었다. 6개월 언도를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 영친왕의 혼례로 인한 특사로 풀려났다. 그 후 정신여학교에 복교해 졸업한 뒤 신천 경신학교와 성진 보신여학교 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전도사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한 김순호의 학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선교사로 임명받았음을 공지한 『기독신보』에는 ‘요코하마여자신학교’ 출신이라 하고, 몇몇 논문에서는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를 졸업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공동집필한 이방원 박사는 다양한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한 끝에 1924년 일본 요코하마공립여자신학교에 입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졸업 후 4년간 재령 동부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던 김순호는 1931년 9월 중국 산둥 여성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가 된 것이다. 그가 지도한 산둥의 부녀도리반은 문맹퇴치로 지역사회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중국 여성들에게도 신앙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도리반은 중국어와 설교에 뛰어났던 김순호가 자신의 재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중국 교계에서 “진꾸냥(중국인이 김순호 선교사를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꾸냥은 ‘처녀’라는 뜻)” 하면 모두 알 만큼 신앙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여전도회주일’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김순호는 그 뒤로도 헤이룽장성 무단장교회, 칭다오, 만주 지역에 파견되어 험난한 선교를 이어갔다. 하지만 만주국의 종교정책에 따라 본국과의 연결이 끊어짐에 따라 개인적 활동으로 전환했다.
해방 후 평양신학교 교수로 제자 양성
김순호는 해방 후에는 평양신학교 여성신학부에 재직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내는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때 배운 제자들 중에 이연옥, 주선애, 이동선, 조순덕 등 한국 교회 여성 지도자들이 있다. 1948년 평양신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게 되자 제자 이연옥과 조순덕이 비밀리에 찾아가 월남하자고 했으나, 김순호는 이를 거절하고 신의주로 가서 전도사로 활동하다 한국전쟁 중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저자 전동현 박사는 “한국 해외 선교의 역사에서 여성 선교사 김순호의 위상은 독보적”이라며 “이후 역사적 평가뿐 아니라 당대의 활약상을 보더라도 그의 굳건한 신앙, 사람을 감화시키는 목회자로서의 탁월한 면모는 남성 교역자들과 나란히 존중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중국 산동의 “진꾸냥”』을 쓴 정안덕 전 북경대학교 철학부 객좌교수는 “김순호 선교사님을 통해 뿌려진 그 알곡들이 힘찬 생명력을 갖고 끊임없이 자라, 온갖 열매 를 맺고 있었구나 하는 느낌을 시종 지울 수 없었다”며 “한 조선인 여성을 통해 복음의 향기가 시공을 초월하여 중국, 일본, 미주 지역에까지 멀리멀리 풍겨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