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차마 말 못 할 숱한 사연을 가진 수좌는 속세를 떠나 불가에 입문하여 도량(道場)에서 불성(佛性)에 이르는 수행 정진 중이다. 이 수행이야말로 물방울이 함의한 성(聖)과 속(俗)의 진성(眞性)을 온몸으로 깨우치는 것이되, 여기에는 햇빛이 온축한 성과 속의 진성이 물방울과 서로 조우하는 가운데 불성을 득의(得意)하는 경이로움의 속성을 띤다. 수좌의 이러한 수행 정진은, 달리 말해 강태승 시인의 시작(詩作)과 관련한 일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태승 시인의 이번 시집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물방울과 햇빛」에서 음미한바, 수좌로서 시인이 불성을 득의하고자 부단히 수행 정진하는 시작(詩作)의 경이로움 자체다.
(중략)
이번 시집의 제명이기도 한 ‘죄의 바탕과 바닥’은 ‘지옥/천국’의 대위적 인식과 상상에 제동을 건다. 지금까지 몇 편의 시를 톺아봤듯이, 강태승의 시편들은 시(인)의 수행 도정과 다를 바 없다. 「물방울과 햇빛」의 수좌승이 시인과 동일성을 갖듯, 그렇다면 불도(佛道)에 수행 정진하는 ‘수좌승=시인’에게 ‘지옥/천국’은 서로 정반대의 대위적 윤리철학 세계로 함부로 구분되는 게 아닌, 다시 말해 불가의 불이론(不二論)이 함의하는, 근대의 합리적 이성으로 서로 다름을 인식하고 구별짓기하여 타자를 맹목적으로 배척하고 타매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진리 탐구를 요구한다. 강태승 시의 ‘슬픔의 풍요’가 자아내는 시적 공명에 감응하는 이유다. 그러면서 ‘죄’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죄’를 낳는, 그리고 ‘죄’와 연루된 것과 절연된, ‘죄’의 어떤 고유 영역을 ‘죄의 바탕과 바닥’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며 수행 정진하는 ‘수좌승=시인’의 존재를 거듭 주목하자.
(중략)
강태승 시인의 시적 수행 정진이 불이론(不二論)과 성속(聖俗)의 포개짐과 어떤 경계의 자연스러운 넘나듦이 함의하는 시적 진실의 도정임을 주목하고 싶다. 아울러 그의 시작(詩作)이 우리의 일상 속 ‘태초의 내재율’을 향한 시의 감응력이 배가하는 것임을 주시하고 싶다. 그럴 때 우리는 시적 화자가 막걸리를 마시며 슬픔과 기쁨이 뒤섞이는 삶의 떨림에 대한 시적 재현으로서의 내재율이 미치는 시의 감흥에 함께 전율할 터이다. (하략)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