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로 지은 집과 친구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가 사라지면
그것과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의 이름처럼
- 「다크 나이트」에서
『집 없는 집』의 1부는 ‘집’에 대한 꿈같은 형상들로 가득하다. 1부에 모인 시의 제목인 ‘생각의 집’, ‘별들의 집’, ‘겨울의 집’, ‘시간의 집’, ‘늙은 천사의 집’, ‘불빛 환한 집’, ‘희망의 집’ 등이 보여 주듯 『집 없는 집』의 ‘집’은 구체적인 삶의 면면보다 희미하고 추상적인 형상으로 제시된다. 그 형상은 주로 안개나 먼지, 얼음과 흙처럼 부서진 잔해의 이미지로 거듭 그려졌다가 지워지는데, 그래서 여태천의 ‘집’은 차라리 ‘폐허’에 가까워 보인다.
폐허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사람이 떠난 후 오직 시간만이 남은 장소다. 존재했던 모든 것이 시간의 힘으로 흔적조차 사라진 후에 오직 ‘사라졌다는 사실’만이 선명한 곳. 바로 그곳을 여태천의 시는 ‘집’으로 삼는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사람과 사물, 사라진 존재들의 ‘집’이다. 그리고 시인은 기꺼이 그 폐허의 일부가 된다. ‘친구’도 소환한다. 친구는 나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 같기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영원한 타인 같기도, 나보다 나를 잘 아는 나의 영혼 같기도 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친구와 함께 여태천의 시는 점차 폐허가 되어 갈 삶의 모든 순간을 한 걸음 한 걸음 통과한다.
■ 존재보다 구체적인 생활
자식은 아무리 크게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노인이 원망스럽다. 언제고 세상이 답답하지 않은 적 있었을까. 노인도 자식도 저녁이면 악마가 된다. 누구나 일 분이면 악마가 된다.
- 「악마의 생활난」에서
『집 없는 집』에서 폐허를 꿈처럼 거니는 초연함은 1부에서 그친다. 2부부터는 생활의 면면이 구체적인 물성과 냄새로 불현듯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식어 가는 음식, 이발소의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간판과 무뎌진 가위, 우산 없이 비를 맞는 이의 젖어 가는 몸은 그 자체로 무섭도록 매정한 시간의 흐름을 보여 주는 일상의 장면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속절없이 붙들린다. 육신만큼이나 무겁고 구체적이며 지리멸렬한 먹고사는 일, ‘생활’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활은 전화벨 소리처럼 불쑥 끼어들어 나를 흔든다. 옆구리를 훅 찌르는 칼처럼 나를 갑자기 붙들고 길을 물어보는 모르는 사람이나, 치매 앓는 부모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느닷없이 지르는 비명처럼. 생활은 우리가 표정을 감출 새도 없이 “누구나 일 분이면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끝에 16편의 ‘포비아’ 연작 시가 고해성사처럼 이어진다. ‘아침’에 깨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일인용’의 고독을 느낄 때도, ‘가족’과 ‘이웃’에게 부대낄 때도, ‘있음’이라는 자명한 사실과 ‘진심’에도 불안을 느낀다는 것에, 그 무엇으로도 불안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며. 시인은 쓴다, 시간의 잔해 같은 ‘기억 곳곳의 어둠’을 들여다보며.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두려움보다 무섭게, 쓴다. 무섭게 쓰는 동안 시인은 “무서움”이 된다. 기억 곳곳의 어둠마저 품는 거대한 ‘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