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에세이스트 정관출 작가의 자전 에세이이다. 베이비붐 시대에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남성이라면 마치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할 만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생생한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작가는 수필을 읽는 게 부담이 없어 좋고, 자주 읽다 보니 쓰기에도 도전하게 되었다며 피천득 선생의 수필 정의를 인용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이라기보다는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단순한 글이며 그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또는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다 좋은 것이다’. 작가는 이 책에 대해 “평범하고 소탈한 삶을 갈망하며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일상과 소소한 생각들을 적은 것”이라며 “부담 없이 편하게 읽어주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 ‘그리움은 경남 남해 어촌마을 출신인 작가의 어린 시절 추억의 장면들을 그렸다. 어촌마을에서 살지 않았다면 갖기 힘든 소재인 ‘바래와 해루질’을 비롯 ‘빼때기와 빼때기죽’, ‘그 많았던 개구리와 뱀은 어디로 갔을까?’ 등 4편은 6070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제2부 ‘삶’은 작가의 직장생활 에피소드와 취미 등을 담았다. 취미생활로 ‘나물캐는 남자’의 전문적이고 세심한 나물 탐구 스토리는 백과사전 지식을 뛰어넘는 인간미와 재미를 선사한다. 젊은 시절 두주불사(斗酒不辭) 했던 저자는 술에 얽힌 추억을 묘사한 ‘술’은 스릴과 해학을 간접체험하게 해준다.
제3부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는 5년간의 투병 끝에 후두암 완치판정을 받은 60대 남자의 후반 삶의 설계와 죽음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는 사모곡(思母曲)으로 엮었다.
작가는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그들 못지않은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글쓰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즐기는 데다 선천적인 유머 코드를 포착하고 글에 녹여내는 능력 덕분이다. 작가의 추억담에는 유머코드가 빠지지 않는다. 추억 자체가 재미있는 서사인데 유머코드로 인해 독자는 저도모르게 웃음을 짓게 된다. 예를 들어 제1부 ‘그리움’의 제1화 ‘그 많던 개구리와 뱀은 어디로 갔을까?’를 보자. 작가는 요즘 시골에서도 개구리와 뱀을 보기 힘들어졌다면서 뱀과 관련된 군대시절 일화를 소환한다. 상병 시절 병장과 싸리나무 베러 갔다가 병장이 까치살모사 두 마리를 잡았다가 오히려 그 뱀들에게 물려 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되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함께 있었던 작가가 본부에 불려가 시말서를 혼이 났는데, 심지어 정신이 약간 이상한 병사로 취급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시말서에 병장에 까치살모사에게 물린 상황을 ‘김 병장이 뽀뽀하는 것을 싫어하는 뱀에게 억지로 계속 강요하다가 결국 화가 난 뱀에게 물렸다’고 묘사했기 때문이다.
제2부 ‘삶’ 제6화 ‘동문서답’도 읽다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여전사 스타일의 어머니와 내성적이고 순한 성격의 아버지에 관한 에피소드의 한 장면인데,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일방적으로 지시하셨는데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어머니의 ‘명령’을 못들은 체 동문서답으로 반격하면서 반전이 일어난 이후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약자인 아버지를 동정하는 차원에서 소리 없이 응원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느 순간부터 메모지에 적어서 그날의 임무를 전달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날부터 아버지는 체념한 모습으로 예전의 착한 돌쇠 아저씨로 돌아갔는데, 독한 부인을 만나서 굉장히 고생하시다가 가신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많다. 얼마 전 큰 누나가 꿈속에서 십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아버지에게 “어머니도 아흔이 넘어 만나실 때가 되어가니 어머니가 오면 사이좋게 지내시라.”고 당부했더니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면서 대답 대신 한마디를 내뱉고 급히 가시더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큰누나한테 내뱉은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의 어머니와 반대 스타일의 여성과 이미 재혼하였다. 그러니 더는 그런 부탁은 하지 말아라.”
제3부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에 수록된 표제작 ‘죽는 공부’에도 심오한 지혜가 담겼으면서도 ‘빵’ 터지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부산 중앙동의 용두산 공원에 올라갔는데 가까운 친구 사이인 듯한, 팔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 두 분이 백산 안희제 선생 흉상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정장을 차려입은 그분들이 멋있기도 하고 해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키가 큰 노인이 친구한데 말했다.
"이놈아! 너 아파서 걷기도 힘들고 밥도 물도 안 넘어가고 해서 죽고 싶은데 안 죽어지모 그때는 우짤끼고?“
키가 작은 할아버지가 “꼭 답을 해야 겠나? 그때는…” 하면서 잠깐 뜸을 들이시더니 한 수 가르쳐준다는 듯이 씩씩하게 말했다.
“바보야, 눈을 확 쎄리 감아삐모 된다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