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제가 가진 유일한 것이죠,
글쓰기는 나의 고통스러운 환부이자 나를 치유해주는 약이랍니다.”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중편소설은 자전적 요소가 두드러진 작품들이다. 「어린아이」와 「정신병동 수기」는 작가 자신이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두 작품에 비해 허구적 색채가 강한 「마귀 들린 아이」 역시 천대받는 장애아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작가의 실존적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태어난 직후부터 림프 부종, 반복되는 폐렴과 싸우며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며, 합병증으로 시력과 청력을 잃을 뻔한 라반트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병마와 싸우며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했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주위 사람들과의 소통이 단절된 상태에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미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다. 나치 점령기(1938~45)에는 ‘장애인 안락사’의 공포 때문에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고 종전 이후 ‘봇물처럼’ 글을 쏟아냈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극한의 절망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라반트의 소설은 사회의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의 고통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듬는다. 라반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 즉 상처 입은 어린이와 여성의 영혼, 차별, 빈곤, 질병, 강요된 순응, 편견과 폭력, 그리고 사랑과 상상력의 해방적인 힘에 대한 황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진실로 체험한 것’에 ‘마법’과 ‘시적 허구’를 가미하여 쓴다. 그러면서도 경험적 제재 자체에 갇히지 않고 자유자재로 활달한 형식을 구사하며, 외부 세계와 내면을 넘나드는 묘사에 능하다. 그녀의 문학은 극한의 환경에서 체험한 진실의 증언이다.
“어린아이들에겐 진실이 드러날지니”
순수한 시각으로 펼쳐놓는 인간과 사회
「어린아이」
작가가 아홉 살 때 안과에 입원했을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이 작품은 붕대로 눈을 반쯤 가린 아이가 과연 다시 세상을 볼 수 있을지 걱정하는 두려움으로 시작된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이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모인 소아 병동에서 아이는 아이들 사이의 권력 관계, 빈부 차이로도 마음앓이를 한다. 집에까지 갈 차비가 없어 퇴원을 못하는 상황에 자존심이 상하고,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엄마에 대한 자부심, 의사 선생님에 대한 믿음과 섭섭함이 어린아이의 눈높이로 잔잔히 서술된다. 아이들의 영혼은 얼마나 깊이 느낄 수 있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강한지, 아이들의 시각과 상상력이 드러난다. 1948년 출간 당시 『클라겐푸르트 신문』은 다음과 같은 서평을 실었다.
“동시대 문학에서 청소년기 체험에 대한 묘사가 이 작품만큼 심리적으로 설득력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극히 독창적인 언어, 환상으로 가득한 저주와 주문呪文, 사람들 사이의 마찰, 삶에 대한 굶주림, 가난의 충격 등이 생생히 눈앞에 펼쳐지며, 신세 타령을 하거나 시적으로 과장하지 않고 자명한 것처럼 묘사된다. 이것은 삶 자체를 글로 옮겨놓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비범하게 강렬한 판타지로 관찰한 삶이다. 여기서 아이들은 죄와 벌을 가차 없이 경험하는데, 그 준엄한 묘사는 더러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이 인간의 영혼을 한 올씩 풀어내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언제나 모든 수인囚人들과 고문당한 사람들,
정신적 장애인들을 생각합니다”
「정신병동 수기」
이 작품은 1946년에 집필했는데, 작가가 출판을 거부해 사후인 2001년에야 출간되었다. 라반트는 스무 살 때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정신병원에 6주 동안 입원했다. ‘수기’ 형식으로 작가의 감정과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같은 병동의 ‘십자가에 매달린 여자’는 자신이 딛고 있는 바닥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거라는 공포심 때문에 하루 종일 벽에 양손을 묶은 채 기대고 서 있어야만 한다. 당사자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이 삶은, 대부분의 정신병동 환자들의 가혹한 운명은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나’는 참담한 좌절을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 사랑에 목마른 이들은 사랑에 대한 갈망이 커서 보통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라반트가 이해하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위로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자기만의 고통에 시달리는 희생자들이다.
또한 정신병원 내부의 행동양식, 권력관계, 억압구조 등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인간 사회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환자들은 간호사와 관리자들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환자들 가운데에도 왕초 노릇을 하는 ‘여왕’이 있고, 환자들 사이의 차별도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나’의 체험적 기록이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자신보다 훨씬 더 절망적인 상황에 몰린 타인의 고통을 차츰 이해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고통을 객관화할 수 있는 자기 성찰에 도달한다.
“아비 없는 자식을 낳은 것도 대죄였다.”
중세적 미신이 현대의 야만과 결탁한 폭력,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추모의 기록
「마귀 들린 아이」
이 작품은 1946년경 집필했으나, 1999년에야 처음 출간되었다. 원제 “Wechselbälgchen”의 문자적 의미는 ‘바꿔친 아이’라는 뜻이다. 장애아가 태어나면 마귀가 갓난아이를 바꿔치기한 거라고 믿었던 서양 중세의 전설, 미신에서 유래한다. 장애아에게는 ‘악마의 저주’라고 낙인을 찍고, 치료(=악마 퇴치)를 빙자해 가해지는 온갖 가혹 행위가 묵인, 방조, 정당화되었다.
‘마귀 들린 아이’라는 소재는 중세의 미신이다. 그러나 실상은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이다. 신부님은 외눈박이 하녀 브르가의 딸에게 ‘매국노’라고 비난받는 오스트리아 여왕과 같은 이름(치타)을 지어준다. “아비 없는 자식을 낳은 것도 대죄”로 매국노에 버금가는 중죄인으로 단죄되는 것이다. 게다가 치타는 말을 못 하는 장애까지 있어서 ‘마귀 들린 아이’라는 낙인까지 찍힌다. 결국 치타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당대의 극단적 국수주의 이데올로기와 장애아에 대한 차별이 유착된 것이다. 중세적 미신이 현대의 야만과 결탁한 폭력은 시대마다 다른 옷을 입고 일상에 잠복해 있다가 치명적인 비극을 불러온다.
치타가 할 줄 아는 단 몇 마디 중 하나는 아이들과의 역할 놀이에서 배운 ‘이빌리무터Ibillimutter’다. ‘내가 엄마야’라는 뜻을 표현한 것으로 치타는 ‘이빌리무터’를 반복하며 위험에 처한 여동생에게 행한다. 엄마의 심정으로 외친 이 절박한 외침은 어린 치타의 영혼과 육체에 가해진 가혹한 폭력의 상처를 뚫고 나온 처절한 절규이자 폭력적 편견과 혐오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사랑의 호소이다. 그리고 이것이 라반트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