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의 탄생, 시에 대한 유쾌한 통찰
박현수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시국시편(詩國詩篇)」은 ‘시국(詩國)’이라는 가상의 국가를 내세워, 시의 본질에 대한 통찰, 시사와 시론, 시인의 박학다식과 그와 어우러진 재치, 그와 더불어 풍자 속에 담긴 현실 인식 등을 유려하게 보여 준다. 또한 시학 연구자로서 전문적인 지식과 감각이 반영되어 있어, 이 시집은 더욱 의미가 있다.
시인은 「서시」에서 ‘시국(詩國)’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어느 날 인사동 한 골목에서 허름한 노인에게 고서 한 꾸러미를 샀는데, 거기에 기이한 책 한 권이 섞여 있었으니 이른바 ‘시국유기(詩國遺記)’라 시국(詩國)이라는 한 나라의 유래와 사적을 운문으로 기록한 필사본으로 낙장이 많았다 이런 나라가 있는지 알 수 없어 옛 문헌에 밝은 벗에게 보여주니 실로 황당하고 기이하여 믿을 만하지 않다 하였다 나 역시 처음에는 미심쩍었으나 석 달을 밤낮으로 읽으매 마침내 그 뜻이 훤하게 비치었으니 이는 환(幻)이 아니라 진(眞)이며 기(奇)가 아니라 상(常)임을 알았다 이에 내용을 간추려 두서없이 옮기니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면하면 다행이리라
- 「서시」 전문
인사동 골목에서 산 고서 꾸러미 속에서 우연히 「시국유기(詩國遺記)」라는 책을 발견하여 그 내용을 옮긴 것이 이 시집이라는 설정이다. 이는 이규보의 「동명왕편」 서문을 패러디한 것이다.
역사 서술 형식을 따른 구성
『시국유기(詩國遺記)』라는 역사책을 바탕으로 한 이 시집은 구성도 역사 서술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주로 「사기(史記)」의 형식을 모방하였다. 그래서 시집의 내용도 서문(序文), 시국본기(詩國本紀), 시국정론(詩國正論), 시국열전(詩國列傳), 시국잡설(詩國雜說), 발문(跋文)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국본기”에서는 시국의 위치, 유래, 역사 등을 다루고 있다. 시국은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강역」)에 있다. 시국의 최고 신은 ‘놀(㐐)’이며, 그 자식이 놀림(몸놀림; 무용), 놀애(노래; 음악), 놀읏(노릇; 연극)이라 하였다. ‘놀’은 놀이, 노래, 노릇 등의 어근으로서, 원시종합예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시국은 시가 곧 삶이 되는 세계이다.
건필 3년, 천제께서 전국에 포고령을 내려 미적 자율성을 논한 모든 책을 거두어 불태우라 하시다 삶과 시를 나누는 것은 천명을 벗어나는 일이며 시를 배반하는 일인 즉, 이는 국시(國是) 시내천(詩乃天)에 어긋나는 일임이라 이때 거둔 책은 미적근대경(美的近代經) 열두 권, 유미일사(唯美逸史) 스무 권 등 총 구십여 종 삼백여 권이다 이 책은 주로 구라현(口羅縣)에서 나왔는바 현감 구라장(具羅長)은 파직되었다
- 「분서(焚書)」 전문
시국도 나라이니 연호가 있다. 건필 3년에 시국의 천제가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미적 자율성에 대한 책을 불태웠다. 시국은 국시(國是)가 시내천(詩乃天), 즉 ‘시가 곧 한울’이며 삶과 시가 하나로 융합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위한다고 생업을 놓은 자, 시를 위한다고 주색잡기에 빠진 자, 시를 위한다고 처자를 버린 자, 시를 위한다고 몸을 함부로 하는 자, 시를 위한다고 허무에 탐닉하는 자” 등은 “가장 흉악한 시국사범”(「포고령」)으로 엄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시국이라고 평화와 조화만이 있을 수 없다. 시국에도 전쟁이 있고 변란이 있다. 그러기에 현실적인 국가와 닮았다.
건필 18년 혜성이 자미성(紫微星)을 범하더니 정국(鄭國)이 서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정국의 백성은 음주가무를 즐겨하나 그것이 지나쳐 음란함으로 기운 지 오래였다 국왕이 이를 다스릴 방법이 없자 정국의 장수 애로(愛露)와 야동(野董)에게 명하여 시국을 침범하였다 적군은 정예병사 5백을 두어 장풍으로 공격하였는데 이를 정풍(鄭風)이라 한다 이 바람을 맞으면 정신이 혼미하고 눈이 충혈되며 몸이 부풀거나 경직되어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이에 서쪽 국경이 무너지고 시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이때 장군 건전(乾田)이 날쌘 궁수 100명으로 적군의 손목을 맞추어 정풍을 멈추고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천제는 장군 건전의 공을 기리어 해동윤리곤대무욕공경대부에 책봉하였다
- 「정풍지변(鄭風之變)」 전문
시국 건필 18년에 정나라가 시국을 침공하였다. ‘정풍(鄭風)’이란 「시경」 중에 ‘정풍’, 즉 ‘정나라의 민요’에 음란한 노래가 많은 데서 유래하여 음란함의 상징으로 쓰이는 말이다. 시가 에로티시즘에 빠져 본래의 정도를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해학적으로 기록한 사건이다. 시인의 시에 대한 생각과 유머 감각이 잘 나타나 있다.
시국도 부침을 거듭하여 서서히 소멸하여 가는데, 시국본기 마지막 부분의 “문쇠 원년”과 “문멸 14년”에는 다음과 같이 일을 기록하고 있다.
문쇠 원년, 주술사 부부가 주술로 세상을 현혹하여 왕위에 올랐다 왕은 요사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다고 하여 이전 궁을 폐하고 요하 이남 백여 리에 용궁을 지어 옮겼다 주술이 주술을 불러 백성들은 점괘에 의지하지 않고는 일거수일투족을 행할 수 없었다 천박한 문인들은 주사위를 던져 시어를 짓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천어(天語)라 하여 숭상하였다
- 「천어요설(天語妖說)」 부분
문멸 14년, 나라에 변괴가 무성하였다 3월에 한강의 민물이 동해 건너에서 온 바닷물과 사흘 동안이나 서로 싸웠다 (중략) 7월 24일
흠정사서 「삼국유사」 태공춘추공조에는 ‘봄 2월’이라 한다
에 서울 저잣거리에 사람들이 마치 붙잡는 사람이나 있는 듯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다가 엎어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도 무수히 많았다
- 「오감도(원형)」 부분
특히 문멸 14년의 기록은 이상의 「오감도」와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대부분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가져온 것으로, 거기에 서울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놀라 달아나는 공포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의 ‘7월 24일’은 그 기록을 변형하여 「오감도 시제1호」가 발표된 1934년 7월 24일을 암시하고 있다.
“시국정론”은 원래 「사기」에는 없지만, 시국이 숭상하는 바를 규정하는 정론 같은 내용을 모아놓은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를 하는 시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한 편의 시가 나올 때는 제 홀로 나는 것이 아니라 선인(先人)과 동료의 시가 씨줄과 날줄로 엮이어 태어나니 이를 연기(緣起)라 한다 저 시가 없으면 이 시도 없고 저 시가 다르면 이 시도 달라져 제 본래의 것이라는 게 있을 수 없으니 이를 무아(無我)라 한다 한 편의 시가 세상에 잊혔다가 수십 수백 년 후에 문득 주목을 받으면 다시 태어남과 같으니 이를 곧 윤회(輪廻)라 한다 한 편의 시가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 상투어가 되어 마침내 그게 시인지조차 모르게 되어 버리면 이를 곧 해탈(解脫)이라 한다
불교의 ‘연기(緣起)’, ‘무아(無我)’, ‘윤회(輪廻)’, ‘해탈(解脫)’ 개념으로 시의 본질을 해명한다. 시는 여러 작품의 상호 텍스트적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기에 완전한 독창성이란 없다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시국정론”에는 이처럼 시에 대한 생각을 전문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시인이 최근에 출간하여 김준오시학상을 받은 「시학 개념의 새로운 이해」와 상호 텍스트적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시국열전”은 시의 역사에 등장하는 중요 시인이나 문예사조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사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열전인 것처럼, 이 시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시들이 여기에 모여 있다. ‘전위’에 대해 다룬 시를 예로 들을 수 있다.
전위(田衛)는 불란서현 사람으로 속칭 아반갈도(亞反葛道)라 부르기도 한다 호장한 시풍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의 눈은 네 개이며 보는 곳이 모두 다르다 대개 눈꺼풀이 처져 있어 걸으면서도 꿈을 꾼다 시 속에 수많은 상상 동물 키우기를 좋아하여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다 재봉틀과 우산을 가지고 다니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말의 빈틈을 크게 벌리어 세상이 한때 그곳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였다 말과 말 사이의 전위차(電位差)를 측정하는 전기기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졸년은 미상이다
- 「전위(田衛)」 전문
여기에서 ’전위‘라는 인물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문학을 의인화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한 이 문학은 다다, 초현실주의, 미래파 등에서 보듯이 새로운 상상력과 과격한 실험 및 저항정신을 표현한다. 초현실주의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재봉틀과 우산이 해부대에서 우연히 만남‘이라는 말로 나타낸다. 이는 한 단어와 전혀 다른 단어의 우연적이고 강제적인 결합에서 오는 충격을 설명해 주는데, 이를 흔히 ’전위차(電位差)‘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서로 다른 두 단어가 부딪치면서 생긴 충격 효과를 전기적 상상력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런 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열전은 원래 긍정적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어 사람을 감화하게 하고 부정적 인물을 두어 경계로 삼을 수 있게 하는데, 이 시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당(尾堂)은 고창현 사람으로 종살이하는 아비를 팔아 문명을 떨쳤다 화사집에서 살다가 정신이 혼미해져 귀촉도로 이사하여 국화 속에서 소쩍새와 천둥과 무서리가 서로 얽혀있는 황홀경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으며 질마재에서 신령과 이야기하는 재주를 얻기도 하였다 가난은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호연지기가 있었으나 깃발 흔들기를 좋아하여 끝내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욱일의 깃발을 흔들었고 이후에는 폭군 독두(禿頭)의 깃발을 흔들었다 재주가 방향을 잘못 잡을 때 세상이 아쉬워할 것이 많음을 보여 후세에 경종을 울렸다
- 「미당(尾堂)」 전문
한자를 바꾸었지만, 이 작품은 서정주 시인을 다루고 있다. 시인의 대표작 「자화상」, 시집 「화사집」, 「귀촉도」와 「질마재 신화」, 작품 「국화 옆에서」, 「무등을 보며」 등이 하나로 융합되어 서정주 시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인의 한계를 “재주가 방향을 잘못 잡을 때 세상이 아쉬워할 것이 많음을 보여 후세에 경종을 울렸다”고 표현하여, 시인의 행적에 대한 아쉬움과 후세의 경계를 보여준다.
“시국잡설”은 “시국정론”에서 다루기에 가볍다고 생각하는 잡다한 소재나 주제를 표현한 시들을 모아놓고 있다. 다음 시를 예로 들 수 있다.
연필을 찾는 동안 사라진 구절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지면서 더 빛나는 구절들 멀리 개 짖는 소리 들으며 저희들끼리 어느 이정표를 읽고 있을까 아무도 찾지 않으면 바짝 야위어 마침내 별이 될까 시의 행간마다 얼핏 만져지는 어둠 어느 시도 온전히 빛나지 않은 건 그들의 빈자리 때문일까 메모지를 펴는 동안 사라진 수많은 구절들 어느 이름 없는 바닷가에 닿아 저희들끼리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을까
- 「실종」 전문
이 작품은 시에 대한 영감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질 때 느끼는 아쉬움에서 출발하여 그런 영감이 실린 구절들이 세상 어딘가에 모여 있지 않을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시국잡설”은 시에 대한 잡다한 생각을 다룬 시를 모아놓은 부분이다.
발문(跋文), 즉 “시국유기 발(跋)”은 시국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시를 싣고 있다. 시국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다.
시국이 무너졌다는 흉문이 떠돈다 기심(機心)에 천제가 독살당했다고도 하고 정풍(鄭風)에 성벽이 무너졌다고 하기도 한다 혹은 클리쉐라는 바이러스가 나라에 창궐하였다고도 하고 문약(文弱)이 백성들을 갉아먹었다고도 한다 시국의 유민(遺民)은 궁벽한 산촌으로 흩어지거나 바다를 건너 먼 나라로 숨어들었다고 하기도 한다 허나
시국은 죽지 않는다 지상에 시 한 줄이 쓰이는 한
- 「발문시(跋文詩)-불사국」 전문
시국이 멸망하였다는 소문이 떠돌지만 시국은 멸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상에 시 한 줄이 쓰이는 한” 바로 그곳이 시국이기 때문이다. 시국은 “오직 시 안과 시 밖에”(「발문 별사」), 즉 오직 시와 관련된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생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는 현실적이면서도 초월적인 국가인 것이다.
“문신(文神)의 귀환”
박현수 시인의 「시국시편」은 시에 대한 통찰을 가상의 나라 ’시국(詩國)‘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시집이다. 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통찰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시를 읽는 재미가 있다.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과 고어투의 진중한 문체가 잘 어우러져 있어서, 문학평론가 권성훈은 이 시집을 ’문신(文神)의 귀환‘이라 고평하고 있다. 이 시집은 시의 본질과 사적 전개, 시인, 문예사조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문학 작품일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재미있게 이해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교육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