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흰구름 흘러가는 곳
1. 애국과 그리운 고향의 노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한 편의 시 작품 속에는 시인이 의도한 의미가 내재해 있다. 그러나 그 의도가 훌륭하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시작품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의도는 어디까지나 계획의 차원이고 시작품은 실제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의 요건은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따뜻한 위안과 뜨거운 감동을 먼저 꼽는 평론가들이 많다. 그런 평론가들은 시작품의 본질을 시인의 내적 경험의 순간적 통일성, 그 강렬한 감정이나 정서에서 찾곤 한다.
이런 특성은 시의 화자가 주로 일인칭인 이유이자 서정시가 고백 형식을 띠는 데서 연유한다. 시인 특유의 내적 체험이 보편적 정서와 연계됨으로써 독자들은 주관적이고 사적인 시인의 내면을 공감하고 공유하게 된다. 시인의 고백이 독자의 공감으로 공유되었을 때, 감동과 위안을 주는 좋은 시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김용환 시인은 첫 시집 《저 흰구름 흘러가는 곳》에서 감동과 위안을 주는 좋은 시작품을 많이 보여 주었다.
하늘이 저리 슬픔에 잠겼는데
내 추위의 일부를 적시며
눈 내리고 시린 손을 호호 불며
해 저문 뤼순 감옥 앞을 서성거립니다
정녕 이 나라를 위해
한국 침략의 원흉, 동양 평화의 교란자,
이또 히로부미를 향해 의탄 쏘시고
32세로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님이시여
자작나무 가지 저쪽에서
눈 쌓인 나라 사랑의 산정까지 불어닥치는
피끓는 추모의 바람이여,
백두산 천지에서 한라산 백록담까지
존경하는 우리 후손들의 눈망울에
핏줄의 금이 가고 있을 때
임이시여, 안중근 의사님이시여
임의 주검은 어디에 계시나이까,
잿빛 세상 바람이 허약한 나뭇가지들을 건드리며
지날 때마다, 우리 후손들의 핏줄은 조금씩
땅밑으로 애국의 뿌리를 내리고,
추모하는 마음 또한 그 뿌리 밑으로 젖어듭니다.
아아, 안중근 의사님이시여,
굽어 살피시옵소서.
우리가 해방은 되었으나 아직 통일은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시〈뤼순 감옥 탐방〉 전문-
꽃 피는 봄, 단풍 고운 가을
우리 초등학교 소풍은
현충사로 많이 갔었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구한
세계적 명장인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남 현충사
-시 〈현충사〉 부분-
위에 인용한 〈뤼순 감옥 탐방〉 〈현충사〉 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와 평화의 총탄〉 등만 보아도 시인의 나라 사랑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뛰어난 애국시의 소유자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왜 이제야 우리 앞에 나타났단 말인가. 나타난 게 아니라 우리가 게을러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고향 길〉 〈검은들〉 뿐만 아니라, 시인은 〈고향 하늘〉 〈갑사〉 〈수덕사에 눈 내리면〉 〈초등학교 교정〉 〈설화산〉 〈신정호〉 〈신정관〉 〈영괴대〉 〈온양 1, 2〉 〈옥정교 1, 2〉 〈고향의 곡교천〉 등에서도 고향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여느 시인들과 구별되는 김용환 시인의 방법적인 특이성, 유니크한 시의 표현법에 대해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즘 시단에서 끈임없이 거품처럼 밀려드는 평범성, 일반성, 상투성, 범속성 등 지리멸멸함을 소멸시킨 시인이 자신의 존재를 힘겹게 이동시켜 간 그곳은 바로 고향 온양이었다.
시인은 민중적 서정시인이면서도 주지적(主知的) 모더니스트로서의 신념을 사회파 모더니즘으로 변용시킨 시작품들도 더러 있다.
2. 살아 있는 시어(詩語)로 표현한 서정의 세계
김용환 시인은 위에 인용한 〈겨울 바다〉 〈봄날은 간다〉 외에도 〈봄꽃과 초록잎〉 〈눈 내린 새벽〉 〈가을꽃은 행복〉 〈그윽한 뜻〉 등에서 살아 있는 시어(詩語)로 뛰어난 서정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깊고 넓은 김용환 시인의 서정적 체험들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무심하고 깨끗한 무중력의 공간에서 부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자세와 품격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색창연이란 낱말을 아시나요/ 머얼리 미국 땅 버클리 대학을 생각하면/ 이 봄밤/ 내 마음에 그 단어가 떠오릅니다/ 오래 되어/ 옛 풍치 그윽한 버클리의 건물들,/ 이 봄밤/ 작은 불꽃처럼 내 가슴에 깜박거리는/ 다정하였던 교수들이 떠오릅니다. 〈하략〉”
-시 〈버클리의 추억 1〉 부분-
〈버클리의 추억 1, 2, 3〉과 〈하얀 돌〉 등을 감상하노라면 김용환 시인의 첫 시집은 한국 문단에 신성한 충격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한국 문단의 시작품들이 경박한 기교주의, 이질적인 로맨티시즘, 어설픈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또는 실존주의 따위가 마구 흩뿌려대는 치기방만함이나 몽롱함 등에 빠져 있을 때, 우리의 시인은 민중적인 정서와 쉽고 부드러운 시언어로서 보편주의의 시정신을 철저히 지켜왔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