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보험영업사원이 감행한 일주일간의 일탈!
현대사회의 본질인 소외와 불안에 대한 통찰
“나는 15년 동안 좋은 남편이자 아빠였다. 하지만 이제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 모르게 생긴 17파운드를 어디다 쓸 것인가?”
소설의 주인공은 마흔다섯 살 먹은 중년의 뚱보 보험영원사원, 조지 볼링.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의 곡물·종자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차대전에 참전해서 하급 장교로 전역했고, 운 좋게 들어간 보험회사에서 18년째 일하고 있는 샐러리맨이다. 런던 외곽 대규모 주택단지에서 살고 있으며 겨우 먹고살 만한 형편에(하류 중산층쯤 된다), 아내와 두 아이들과 함께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세일즈맨 특유의 넉살 좋은 성격에, 바람피울 기회라도 생길 참이면 굳이 마다하지 않는 현실 순응적이며 적당히 세속적인 인물이지만, 런던 상공을 날아다니는 폭격기, 임박해오는 듯한 전쟁, 히틀러와 파시즘에 대한 공포로 잠을 설칠 만큼 그가 마주하고 있는 1938년의 현실은 숨 막힐 듯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경마를 통해 공돈 17파운드가 주머니에 들어온다. 그 돈을 어디에 쓸지 고민하다 문득 20년 전 떠나온 고향을 떠올린다. 그가 원하는 것은 빠듯하게 먹고사는 문제들과 반복되는 걱정거리, 무엇보다 전쟁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 고요함이다. 현실의 모든 중압감을 잊고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공간, 어린 시절 그만이 알고 있던 비밀 연못에서 낚시를 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리라는 기대를 품은 채 옛 마을로 떠난다.
“내가 그 잉어들을 낚으러 가지 못할 이유가 뭔가? (…) 나무들 사이에 감추어진 으슥한 그곳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 속을 아직도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거대하고 거무스름한 물고기들 생각도 났다. 세상에! 30년 전에 그 정도였다면 지금은 얼마나 클까?” _267~268쪽
‘숨 쉬러’ 나간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규모 주택단지와 공업타운으로 변해버린 공간,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옛 연인, 쓰레기매립장이 된 비밀 연못. ‘숨 쉴 곳’은 이미 아득히 사라져버렸다.
『숨 쉬러 나가다』는 낭만주의 색이 짙은 이전의 세 장편과 본격적인 정치풍자의 세계로 넘어간 『동물농장』, 『1984』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현대사회의 실체인 불안과 소외의 징후를 예리하게 밝혀내는 예언자적 시선이 전반에 깔려 있으면서도, ‘낚시’로 상징되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곳곳의 장면들은 매우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한편 여러 인물들의 계급과 성격을 묘사하는 솜씨도 돋보인다. 주인공 뚱보 영업사원 조지 볼링을 비롯해 쇠락해가는 관리 계급 출신의 아내 힐다, 사립학교와 옥스퍼드 출신으로 오로지 자신이 나온 학교와 그때 배웠던 고전의 세계 안에 정체되어 있는 포티어스, 히틀러가 없으면 무얼로 먹고살지 모르겠다며 볼링이 조롱하는 반파시스트 연사 등 여러 캐릭터가 오웰의 펜 끝에서 날카로운 묘사로 살아난다.
“차를 몰고 언덕을 내려오며 생각한 것 하나. 이제 과거로 돌아가본다는 생각일랑은 끝이다. 소년시절 추억의 장소에 다시 가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기가 없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쓰레기통 세상의 오염은 성층권에까지 도달해 있다.” _342쪽
2차대전을 예견하는 무섭도록 정확한 안목
저무는 세계, 그것을 잠식하는 ‘현대’의 탄생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주인공 조지 볼링이 좋았던 옛 시절로 회상하고 있는 1910년 전후 무렵과 소설의 현재 시점인 1938년의 시대적 상황을 잠깐 살펴보자. 그 30년 사이 1차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며 영국은 미국에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넘기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파시즘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과 더불어 영국 내부에서도 모든 생활 영역에서 자본주의 원리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던 시기가 20세기 초반이었다.
조지 오웰은 주인공의 회상을 통해, 저무는 한 시대의 질서가 현대라는 이름의 새 시대 정신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담아낸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열심히 꾸려가던 곡물 종자 가게는 대형 할인점의 체계화된 저가 공세에 망해간다.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지침 아래 무조건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여자 종업원과 그녀를 닦달하는 중간 관리자 모두가 해고라는 불안에 떤다. 런던 외곽 주택개발업자들의 사기극과 그들이 엄청난 이익을 거두는 시스템의 구조는 1990~2000년대 한국의 상황과도 너무나 유사하다. 그 모든 느낌은 “생존자는 열아홉 명인데 구명튜브는 열네 개밖에 없는 난파선”(202쪽) 위에 있는 것과 같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들을 밀어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팔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것이 현대인의 운명임을, 무엇보다 그러한 경쟁과 불안감이 전쟁을 겪으며 더 악화되었음을 오웰은 담담히 그려낸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우릴 휘어잡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행동한다는 느낌이라곤 없었고, 저항하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어떤 전쟁도 3개월을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모든 부대가 전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_179쪽
무엇보다 이 작품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다가올 2차대전과 파시즘이 지배하는 세상을 너무나도 정확히 예견했다는 데 있다. 『동물농장』과 『1984』가 2차대전과 히틀러 혹은 스탈린식 전체주의를 경험하고 난 뒤 그 특징과 폐해를 풍자와 패러디로 회고한 이점을 누린 작품이었다면, 『숨 쉬러 나가다』는 (물론 이미 기미나 징후가 있긴 했지만) 철조망과 거대한 얼굴 포스터, 슬로건, 무슨 색 셔츠단, 생각을 지시하는 확성기 등이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냈고, 그것은 작품을 출간하고 난 3개월 뒤 2차대전과 아우슈비츠로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 이후다. 우리가 빠져들고 있는 세계, 곧 증오의 세계나 슬로건의 세계라 할 만한 세상 말이다. 무슨 색 셔츠단, 철조망, 경찰봉의 세계 말이다. 비밀스러운 골방에는 밤낮으로 전깃불이 밝혀져 있을 것이며, 형사들은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감시를 할 것이다. 숱한 행진, 거대한 얼굴 포스터, 그리고 한결같이 영도자를 환호하는 100만 인파.” _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