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에 내일의 날씨를 몰라도, 삶은 지속되는 것이기에”
자신이 가장 낯설 때 비로소 발견하는 나를 사랑하는 법
1부 ‘‘나’를 재빠르게 훔치고 속이는 기술’에는 “거칠고 뾰족한 말”이 난무하는 일상에서 “순하고 다정한 말”(20면)을 일깨우는 따스한 지혜와 관록이 담겼다. 작가는 12‧3 비상계엄과 그 이후 이어진 사회적 파장 속에 갈 곳 잃은 마음을 산책길에서 주운 솔방울을 통해 들여다본다. “겹겹이 페이스트리처럼 속을 알 수 없는”(16면) 솔방울에 귀 기울이며 우리 앞에 펼쳐진 불안한 미래를 직시하는데, 동시에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작은 것들부터 차근차근 돌보는 자세를 가다듬는다. 그렇기에 어머니를 간병하는 “주삿바늘과 소독약의 세계”와 아이들이 있는 “초콜릿과 동화의 세계”(21면)를 오락가락하는 생활의 낙차 속에서도 시인은 낙심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고 수유를 하고, 백일이 지나면 일을 시작하고, 돌이 되어 밥에 적응하면 어린이집에 보내는 방식으로 네 아이를 키”(31면)워낸 연륜과 노련함이라 해야 할까. 거칠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해줄 휴식과 웃음을 잊지 말자고, 종종 샛길을 걸으며 가쁜 호흡을 가다듬자고 조언한다. 버석한 마음에 거창한 사랑을 강요하기보단 사랑에 자신만의 정의를 내린다. 사랑은 “곁을 내어주고 함께 살아가는 일.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는 일. 별다른 기대 없이 받아들이는 일”(40면)이라고. 그렇게 일상 속 비밀한 사랑이 드러나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또렷해진다.
2부 ‘명랑하게 무심하게 때로는 절실하게’에는 나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나가는 가슴 뭉클한 깨달음의 글들이 수록됐다. 후배에게 냉면 한그릇의 여유를 알려주고 길고양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며 딱한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한 선배 시인이 있다. 그토록 자신의 것을 내어주면서도 자신이 “참 많은 사람의 선의를 입고 살고 있다”(62면)고 말하는 그를 보며 우리는 묻게 된다. 혹시 고마움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며 살고 있지 않냐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간 동료 여성들의 이야기 또한 감동적이다. 데뷔 당시 세간의 혹평을 받았지만 점차 진정성 있는 음악으로 사랑받게 된 미국의 자매 밴드 섀그스와 인도의 도적왕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풀란 데비,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페미니즘 운동에 앞장선 테레즈 클레르의 이야기를 경유하며 작가는 여성으로서 세상이 함부로 정한 한계에 도전하는 강인한 정신을 맘속 깊이 새긴다. 물론 여성이기 이전에 한명의 사람으로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한계는 바로 실수투성이인 자기 자신이다. 중요한 자리에서 사람 이름을 엉뚱하게 읽은 실수부터 매번 알면서도 틀리는 맞춤법, 도무지 입에 붙지 않는 알파벳 f와 v의 발음까지, 말과 가장 가까운 시인이기에 그간의 말실수가 헤아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실수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탐구하는 자세다. 그래야만 본연의 ‘나’를 마주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신경질적으로 가지를 뻗고, 시름시름 잎새를 매단 채 버티고 서 있느라”(101면) 언제나 실수하며 살아간다. “실수투성이인 ‘나’를 다시 세워보기 위한 안간힘과 반복되는 실패. 그런 미친 사랑”(같은 면)이 삶이고 또 시라는 작가의 담담한 정리가 매번 넘어지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3부 ‘상처와 고통의 발명’에서는 추억 속 인물들을 회상하며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상실의 빈자리를 시로 채워나가는 이야기들이 애틋하게 펼쳐진다. 우리는 늘 이별하며 살아간다. 닿지 않는 거리에 있어서, 주어진 시간이 다해버려서, 너무 많은 비밀을 공유해버려서, 서로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져서, 각자 바쁜 삶을 사느라 자연스럽게…… 소중한 이들과 멀어지고 헤어지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작가는 다시 볼 수 없는 이들을 떠올리며 죽음에 대해, 애도에 대해, 그리움에 대해, 다시 삶에 대해 질문한다. 살기 때문에 상실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 목련꽃을 닮은 친구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지만 작가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잠시 홀로 애도할 여유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대한 슬픔과 밀려오는 현실 앞에서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해도 아무도 답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바로 시를 쓰는 일이기에 작가는 오늘도 스스로 질문한다. “우리가 보내는 시간이 이토록 귀하고, 이토록 허무해서 시란 숲이 있고, 그곳에서 한그루 나무에 대해 애써 말하는 것이 아닐까.”(151면) 읊조리는 문장 속에 삶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는 사유의 정수가 오롯하게 차오른다.
마음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당신만의 방을 가득 채워줄 다정한 용기
동네 해물탕집 주인아저씨가 애지중지 키우는 과실수들은 작가에게 큰 행복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싱그럽게 자라난 무화과, 석류, 감귤, 수박은 존재 자체만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듯하다. 작가는 이렇듯 일상에서 주변을 탐구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시란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는 것, 아름답지만 규정하기 어려운 것, 애쓰고 공들이는 것, 발견하고 창조하는 삶의 편에 서는 것”(145면)이라는 이 문장에 ‘시’ 대신 ‘삶’을 대입해 읽어보자. 시와 삶이 함께 걸어가는 작가의 진심이기에 문장을 곱씹을수록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상실과 비애, 고단한 일은 과거에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반복되겠지만 무기력하게 슬픔에 잠길 수만은 없다.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고 이근화의 작은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보자. 각박한 삶에 치여 낯설어진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자취를 감췄던 행복의 실마리가 보이고 내일을 살아낼 용기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