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배우느라 늦어버린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 편지,
소박해서 더 뭉클한 진심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소망일 수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가난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했던 순천 할머니들에게는 편지가 그런 존재다. 여든 앞에서야 글을 배워 직접 자신의 이름을 쓰고 주소를 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말로 차마 전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편지를 쓰고 싶었다.
“오빠가 군대에서 나한테 써 준 편지 받고 저녁에 혼자 몰래 울었어. 답장을 못 하는데 어쩔까,
답장을 못 보내서 어쩔까, 하고. (……) 이제야 진짜 하고픈 말을 쓰네. 나한테 편지 써 주고 힘드냐고 물어봐 줘서 참으로 고마워.”
_황지심, ‘오빠에게’ 중
2019년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를 출간하며 많은 이들의 관심과 응원, 사랑을 받았던 순천 할머니들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이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글을 배운 뒤에도 소원을 이루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2020년 찾아온 팬데믹으로 세상이 잠시 멈추었고 고령인 할머니들의 그림과 글 수업도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써낸 분들이 계신다. 이 책은 그 열네 명의 할머니 작가들의 포기하지 않는 마음 덕분에 6년 만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 사이 글은 더 따뜻해지고 그림은 한층 섬세해졌다.
세월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슬픔, 아픔, 서운함,
그러나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말은 결국 사랑
가슴을 꽉 채웠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건네지 못한 마음이 있다. 편지에 담고 싶었으나 글을 배우지 못해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 다 주고도 항상 덜 준 듯이 미안하기만 한 딸과 아들, 어린 시절부터 쭉 함께한 친구, 원망하고 미워도 했으나 누구보다 의지하고 사랑한 남편, 그리고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난 어머니와 아버지, 늦었지만 꼭 써야 했던 편지는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담아둔 사람을 위해 것이었다.
“아버지가 술을 먹고 와서 싸우는 날이면 어머니가 도망갈까 봐 밤새 잠을 못 자고 불안했습니다. 어머니는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고 어렵게 나를 살려 주셨는데 살아생전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어머니 정말 감사하고 보고 싶습니다. 살면서 힘들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용기를 냈고 열심히 살다 보니 노후가 행복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 정오덕 ‘그리운 어머니’ 중
오랜 시간 가슴속에서 여러 번 썼다 지우고 이제야 종이에 써 내려간 편지글은 시집살이로 받은 상처와 자식에 대한 서운함과 미안함, 더 나은 관계와 삶을 향한 여성의 욕망 등을 솔직하게, 짧지만 묵직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마치 마침표처럼 꾹꾹 눌러썼다. 순천 할머니들의 편지는 지극히 사적인 글이지만 내 어머니, 혹은 할머니의 편지를 몰래 발견하고 읽는 듯 공감하게 만드는 보편성이 있다. 부모의 속마음이 궁금한 세상의 모든 딸과 아들에게 정독을 권한다.
더 과감하고 섬세해진 그림이 전하는 깊은 울림
이 책 〈글을 몰라 이제야 전하는 편지〉의 편지글은 담담하지만 그림은 과감하고 섬세하다. 순천 할머니 작가들은 첫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를 출간하며 전국 곳곳의 갤러리, 도서관, 책방, 그리고 미국과 볼로냐 등 해외 여러 도시에서 전시를 열었다. 할머니들의 개성 넘치는 그림은 관객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그 경험과 함께 작가로서의 자신감과 자부심, 열정이 더해졌다. 이는 새로운 그림에 담겼다.
책을 판매한 인세로 할머니들은 전문가용 스케치북과 색연필 등 그림도구를 구입했으며 팬데믹으로 수업이 중단되었을 때도 혼자 집에서 그림에 집중했다. 그렇게 완성한 그림에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깝지 않은 아름다움이 가득 들어찼다. 고유한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더 과감한 색 사용과 독창적인 구도, 유머러스한 인물 묘사 등을 선보여 볼수록 흥미로운, 작가로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 모습을 보여 준다. 시간을 멈출 수는 없지만 이들의 그림을 더 많이, 오래 볼 수 있도록 조금 천천히, 순하게 흐르기를 바라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