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애착’이 아니라
‘분리-독립’의 키워드가 필요한 시대
한 대형병원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레지던트 한 명이 소속된 의국에서 문제가 생겼다. 병원 안에서 의국은 하나의 조직이고, 그 조직 안에는 수많은 역할과 책임이 얽혀 있고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잘못인지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한 사건이 생겼는데 책임 소재를 밝혀야 했고, 결국 질책은 레지던트 한 명에게 떨어졌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지만, 웬만한 직장인이라면 속으로 삭이고 넘겼을 일이다. 그런데 다음 날, 그 레지던트의 어머니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어머니는 과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왜 우리 딸이 문책을 받아야 하냐며 격앙된 목소리로 따졌다. 환자 보호자도, 병원 관계자도 아닌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병원 인사 문제를 따지는 상황에 과장은 당황했고, 레지던트는 그 일을 계기로 병원을 그만두었다.
힘들게 들어간 병원이었을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과, 가장 경쟁률 높은 자리였다. 의과대학이라는 험난한 관문을 지나, 남들보다 앞서 출발선에 선 인재였다. 어머니는 수십년간 인생을 다 바쳐 키운 딸이 수모를 당했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꼈고, 그걸 못 견뎌서 딸에게 퇴사를 강요했다. 보통은 부모가 아무리 화를 낸다 해도 직장에서 일어난 일은 성인이 된 자녀가 스스로 결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레지던트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어머니가 기분 나쁜 것은 기분 나쁜 거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어야 하는데, 20대 후반이 되도록 여전히 엄마와 분리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일상생활은 물론 학습계획과 장래희망까지 딸은 늘 엄마와 논의했을 것이다. 엄마의 뜻인지 나의 뜻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아마 딸이 의대에 합격했을 때, 대치동에서는 성공 사례로 회자되었을 것이다. ‘대치동 시스템’이 만들어낸 명문대 합격 스토리. 그런데 거기까지가 대부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의 끝이다.
자기주도성과 독립성은
적절한 좌절에서 시작된다
공부는 잘하지만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어 엄마가 정해주는 길을 따르는 아이들,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신경쓰거나 쉽게 분노하는 어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누가 피해를 보든 상관하지 않고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며 사과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
20년 동안 소아정신과 진료실에서 아이와 부모를 마주해온 정신과 의사 류한욱 원장과 인간의 심리 구조를 연구해온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어낼 가장 근본적인 개념을 ‘적절한 좌절의 부재’, 즉 ‘분리-독립의 실패’로 보고 그에 관한 심리 교양서 『적절한 좌절』을 출간했다.
적절한 좌절(optimal frustration)이란 아이가 성장하는 어느 시점에서 세상이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배우는 과정을 말한다. 아이가 하루하루 자라는 동안 부모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 불확실한 틈에서 아이는 낯선 감정을 마주하며 시행착오를 거쳐 서서히 독립된 개체로 커가게 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의 부모는 아이의 자기주도성과 독립성을 원하면서도, 아이가 초등학생, 청소년, 심지어 성인이 될 때까지도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저자들은 지금 한국 사회가 애착 과잉 시대에 있으며, 애착 관계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정서적 비만’인 상태의 아이들을 양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정서적 보살핌이나 끊임없는 감정 개입을 받게 되면, 스스로 감정을 소화하고 조절하는 힘이 제대로 자라나지 않는다. 마치 칼로리를 지나치게 섭취하면 비만이 되는 것처럼, 감정에서도 소화되지 못한 애정이 쌓이면 ‘정서적 비만’ 상태가 된다. 이렇게 된 사람은 작은 실패나 비판에도 쉽게 무너지고, 혼자서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워 누군가의 위로나 인정 없이는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린다. 타인의 관심과 반응에 계속 의존하게 되고, 혼자서 결정하거나 책임지는 일에도 자신이 없다.
이런 정서적 비만은 대개 ‘애착 과잉’의 부모에게서 비롯된다. 자녀의 모든 감정과 행동, 선택에 하나하나 개입하거나 대신 결정해주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자율성과 독립심을 기르기 어렵다. 사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해서 하는 행동이지만, 지나친 애정은 아이가 필요한 만큼의 좌절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독립된 인격체로 크는 데 큰 장애가 되고 만다. 요즘은, 정서적 영양분을 너무 늦은 시기까지 끊지 못해 아이가 부모와의 분리를 어려워하고, 결국 혼자 설 수 없는 어른으로 자라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자녀가 스스로 욕망을 탐색하고 자기 삶을 삶을 설계하는 법도, 감정을 다루는 기술도 배우지 못한 채, 신체적으로는 다 자랐지만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인 상태인 어른이 되고 있는데, 저자들은 그 심리적 배경에 분리-독립 과정의 실패가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이 책을 통해 적절한 좌절 경험의 필요성과 분리-독립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아빠의 무관심, 엄마와의 일체감
대치동 사교육 시스템이 낳은 부조리
또한 이 책은, 대한민국의 과열된 사교육 시스템 또한 부모가 자녀를 독립된 존재로 보기보다,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심리적 구조 안에 있다고 분석한다. 아이는 태어나면서 분리-독립이 되기 전까지는, ‘엄마와 나만 있는 세상’과 ‘아빠와 나만 있는 세상’에 살다가 점차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면서 하나의 독립체로 완성된다. 그리고 자기 영역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 지나친 간섭에는 저항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불편한 엄마들은 자연스럽게 ‘아빠와 관계가 형성되면 아이가 내 말을 잘 안 듣는다’는 점을 알게 되는데, 사교육 열풍이 높은 지역에서 “아빠의 무관심이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데 더 유리하다.”는 이상한 말이 돌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과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면 모두가 분리-독립 개념을 모두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르시시스트가 늘어나는 현상, 관계 안에서 책임을 회피하거나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어른들의 문제 역시, 이 분리-독립의 실패에서 파생되는 문제라고 강조한다.
정서적 비만,칭찬 중독,자의식 과잉을 넘어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조언
무엇보다 이 책은 단순히 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아이의 발달 단계에서 부모가 어떤 방식으로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해야 하는지,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관계 속에서 자율성과 친밀감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그것을 어떻게 회복해 나갈 수 있는지를 실제 사례와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신체적·인지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아직 독립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일상에서 겪는 갈등과 감정적 불안을 어떻게 마주하고 조절할 수 있는지를 따뜻하지만 단단한 언어로 풀어낸다.
이 책은 우리가 삶 속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며, 부모로서, 개인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심리적 독립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육아나 교육에 국한된 조언서가 아니라,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법, 타인과 건강한 경계를 형성하는 법, 스스로를 지지하며 성장하는 태도에 대한 실질적인 지침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에게는 ‘제때 잘 떠나보내는 법’을, 흔들리는 어른에게는 ‘다시 자기 자리를 찾는 법’을 전하는 이 책은, 애착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를 위한 심리 독립 매뉴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