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인생은 뒤돌아볼 때만 비로소 이해된다. 자살로 세상을 떠나려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죄악이며 또한 신에 대한 반역이다. 인간이 자신을 알고 자신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을 때 삶은 평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며, 자기를 있게 한 신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알고 자신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을 때 삶은 평화를 얻는다. 청년은 희망의 그림자를 노인은 회상의 그림자를 가진다. 완전하고 건강한 인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정신의 병을 갖고 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현재, 과거, 미래의 끝없는 연속이며 절망하는 순간 또 다른 절망을 부른다. 자살로 세상을 떠나는 건 인생에서 가장 큰 죄악이며 또한 신에 대한 반역이다. 우울함이 사라지고 재생을 경험한 키르케고르는 ‘죄와 그 속죄’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했다. 기독교계에 기독교를 끌어들일 《죽음에 이르는 병》은 자신의 상처를 통해 불안과 절망에 고뇌하는 근대적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이 세상에 진리는 수난에 의해 밝혀지고 그리스도는 수난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당연히 몰락을 각오해야 한다. 참으로 진리에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순교자여야 하며, 이 세상의 지혜와는 반대로 신에게 선택된 자라면 누구보다도 깊이 고뇌해야 한다. 이처럼 신과의 관계는 박해받고 순교하는 것이므로 참된 그리스도교는 대중의 종교일 수 없다. 기독교인이 되는 길은 자기 자신의 죄의식에 의해 자기 스스로 결단하는 길밖에 없으므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혼자이지 않으면 안 된다. 각자가 오직 하나의 인간으로서 신 앞에 서야 한다고 키르케고르는 말한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인간은 ‘정신’이며 그 ‘정신’은 곧 ‘자기’였다. 인간은 무언가에 대해 절망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절망하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려 한다. 절망이란 자기의 ‘영원한 것’을 상실한 상태이며 절망의 강도는 인간 실존에 대한 인식의 강도에 따라 상승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절망이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인간은 절망을 통해서만 진실로 구제될 수 있다. 사람들은 절망을 ‘병’으로 받아들이고 ‘약’으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한 마디 덧붙이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자칫 죽을 병, 즉 그것으로 죽어 버리는 병처럼 그런 의미의 병이 아니라 그것으로는 절대 죽지 않는 병이며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병이다. 역설적으로 ‘절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죽어서 또는 자살해서 묘지에 안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 절망의 극치라고 할 수 없다.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것, 끊임없이 죽음에 직면하고 죽음에 이르면서도 죽을 수 없는 것, 그러고 영원히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것이 절망하는 사람 또는 가장 불행한 사람의 참모습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 실존은 단독자(單獨者)인 죄인으로서 절망하든가 아니면 신앙으로 비약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결단 앞에 서 있는 것이며, ‘인간은 기독교로 돌아가 자기의 내면을 수련(修練)함으로써 구제될 수 있다’고 했다. 이 책은 기독교의 이상형으로부터 거리가 먼 자신을 포함한 현실의 기독교계를 신랄한 논리로 비판하고 절망이라는 병에 대한 모든 증세를 분석하고 진단하여 치유의 길을 제시했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실존 개념’도 이 책의 영향이 컸으며 사르트르나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 개념’도 절망의 한 형태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한 실존주의의 많은 영향을 끼친 유례없는 철학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