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신필영의 단시 시편들을 읽으면서 화가이자 동양 미학자인 킴바라 세이고(金原省吾)가 그의 저서 『동양의 마음과 그림』에서 말하는 ‘적(寂)의 미학’이 떠올랐다. 사물의 분명한 세계를 명백(明白)이라 한다면, 상대적으로 모호한 세계가 적막(寂寞)이다. 알고 보면 시의 진리와 진실은 이 적막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적막의 적(寂)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사이’로 바라보는 존재의 비밀이기도 하다.
유현(幽玄)한 태도로 사물을 바라보는 게 ‘적(寂)’이라면, 그의 시에는 그런 유현한 취(趣)와 아름다움(美)이 나타나 있다. 유현한 취미는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의 모습 속에 나타나는 것을 느끼는 일을 말한다. 예컨대 「굿모닝」이라는 제목을 붙인 시에서, “물 끓는 소리 안고/환하게 곁에 앉아//찻잔을 비운 뒤에도/자리 뜨지 못하는” 존재는 숨은 연애를 하는 애절한 연인 같은 둘이다. “늪을 직시하지 않고 바람의 향기나 개구리 속에 나타나는 늪을 본다거나 바다를 나무의 틈새로 조금 내다보는 게 유현이다. 나무의 모습을 직접으로 보지 않고, 흙 위에 떨어진 그늘로 보는 게 유현이다”(킴바라 세이고金原省吾, 『동양의 마음과 그림』, 민병산 역, 새문사, 2003, 158~159쪽).
하나의 사물에서 그 존재에 내재하고 있는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마음, 나아가 무(無)에서 유(有)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은 프랑수와 줄리앙의 『무미예찬(無味禮讚)』과도 접맥된다.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별맛 없이 별난 맛이 이런 걸까”라고 한 언술이 바로 이런 맥락이다. 겸양의 태도로 말을 했지만, 그 겸양의 어사가 존재의 비밀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맛은 대립시키고 분리시키지만 ‘별맛 없음(淡)’은 사물과 현실의 여러 양상을 서로 열어주고 소통하게 해준다. 그것은 다양한 양상들의 공통점을, 그 근본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담(淡)은 전체적인 인상이며 개별적 관점의 편협함 너머에 세계와 존재를 감지하게 해준다. 그 사유는 현실의 양상들을, 생성의 국면들을 따로따로 고립시키고 대립시키는 대신, 서로 소통하는 것을 의식한다. 모든 것이 항상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 이행 중에 있음을 의식한다. 그것이 ‘별난 맛’ 즉 오묘하고 유현한 맛으로 번져가고 확산되는 미학이다.
둘둘, 감겨든다
목덜미 깊숙한 곳
영하 십몇 도의 된바람을 받아내며
끝까지
내 편이라고
속속들이 파고든다
- 「털목도리」 전문
작은 소도구가 생명으로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전신(轉身)의 지점이 이 시에는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물이었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죽은 짐승의 외피였던 털목도리가 산짐승이 되어 “끝까지/내 편이라고/속속들이 파고”드는 것이다. 여기서 앞서 말한 ‘하나의 사물에서 그 존재에 내재하고 있는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마음’이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이음Fügung’이라고 하는데, 이음은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를 구성하는 중심개념 중 하나로서, 이 시는 이음의 ‘출발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털목도리는 하나의 생명체로 완벽히 이행한다. “영하 십몇 도의 된바람을” 기꺼이 받아내어 주는, 피붙이같이 헌신된 몸으로 화육하는 것이다. 털목도리는 화자와 이미 이런 관계성을 형성하며 가까이서 존재한다. 사물에서 생명으로 옮아오는 이 지점이 바로 타자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는 부분이다. 추울세라, ‘둘둘’ “내 목덜미 깊숙한 곳”까지 감고, 네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래도 “내 편이라고” “속속들이 파고”드는 동물의 인간 용서가 아닌가. 나와 동류였던 인간에게 잡혀 먹이가 된 몸이었으면서도 외피까지도 인간을 데워주고 감싸주는 이런 자비. 그래서 이 시는 표면적 생태시학의 영역을 넘어선다. 늦었지만, 화자는 눈시울을 적시며 나와 야생의 동물은 우주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털목도리를 통해서 우리는 성큼 성장한 자아를 볼 수 있게 된다. 시인에게 그런 의식은 인간이 빠진 자리에서도 작동한다.
- 손진은(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