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말을 할 수 있어서 만유 중 가장 소통이 원활한 종이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말은 이해와 오해를 동시에 유발하기 때문에 소통의 어려움이 필연이다. 현시대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인간처럼 써내는 기술까지 개발하는 시대여서 인간의 말이 해석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기 어렵다. 말이란 본래 과학의 황무지에서 태어나지만, 지금은 과학처럼 정교한 말의 탄생이 가능한 시대다. 이런 마당에도 우리는 말 때문에 갈등이 깊어지면서 말의 빈틈을 수시로 경험한다. 사람의 말이 사람 사이를 갈라놓지만, 이것을 다시 봉합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흔히 있다.
장인환의 첫 시집 『목각인형』은 외부와 소통이 끊긴 단독자가 점차 늘어나는 최근 우리 사회의 면모를 반영한다. 타자와 나누는 말의 효능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는 화자의 목소리에 공감하면서 이 시집을 읽게 된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 소통하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가 건넨 말의 빈틈을 메우지 못한다. 가족·친구·연인, 그리고 가까이 사는 이웃들과의 관계 경험과 상념들이 그 타자성을 사유하는 계기를 안길 뿐이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세대 간, 부부간, 부자간, 이웃 간 갈등에 주목하여 이 타자적 존재들과 어떠한 배려와 마음 씀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다. 특히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불거지는 기성세대와 Z세대 간 갈등을 가족 내 관계로 짚어나가면서 아버지의 자리에 변화가 생겼음을 환기한다.
시인은 작은 공동체인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방적으로 한 사람이 희생하도록 몰아가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서로를 위한 배려라고 본다. 누군가 희생되어야 평화와 안정이 가능하지만 과연 누가 먼저 그 일을 자임할 것인지는 크나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이겠지만 이 시집에는 아버지가 묵언 수행자처럼 이 일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보다 먼저 마음 씀의 미덕을 발휘하여 가족의 평화를 조성하고 싶은 사람이 아버지다. 그는 고통을 고통이라 말하지 않고, 슬픔을 슬픔이라 말하지 않는다. 고통이 없는 사람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그의 내심을 헤아려보게 하고, 그가 피우는 담배 한 대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이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이 문장은 제각기 다른 불행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에 대한 곤경이 녹아 있다.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를 가족 공동체로 알고 있는 우리는 작가가 재현한 가족 이야기를 읽으면서 미적 즐거움을 누리지만, 막상 자신이 속한 가족 공동체에 불행의 요인이 끼어든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아래 시는 단지 불행한 가족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이 시대 아버지의 위상을 아들의 그것과 대비하여 보여준다.
지니 티비 꺼
아니야 지니 티비 켜
조용히 말하던 서로의 목소리가
점점 언성이 높아집니다
위험한 신경전이
말이 없는 가운데 오가고
리모컨을 찾아 쥔 아들이
말없이
틱틱
시청권을 찾아 쟁취합니다
-「리모컨」 부분
누구나 가족 내에서 성장통이 필연인 것처럼 시적 화자의 경험도 가족 안에서 먼저 일어난다. 가부장 중심의 가족 구도에서 억압되었던 욕구에 관하여 말하는 경우는 시인에게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장인환 시인의 가족 이야기는 개별 시편에 실려 나오지만, 이 시들을 한 줄에 꿰어 읽다 보면 매우 의미 있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각기 자기 욕구에 충실한 가족 구성원들로 하여 평온과 안락, 공평함 등의 균형이 깨진 가정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는 어느 가정이든 희로애락을 나누는 공동운명체로 존속하려 하는 한 흔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다. 이 같은 당위성을 잃어버릴 때 가족 간 갈등을 자초하고, 이 시집의 화자인 아버지처럼 홀로 말 없는 고투를 이어가야 한다.
명령어 “꺼”와 “켜”에 아버지와 아들의 감정이 첨예하게 실려 있다. 리모컨 장악력이 아버지에게 있을 거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시현실에서는 의외로 아들이 그 주권자다. 그가 선점한 리모컨 때문에 방에서 밀려난 아버지가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서로 취향이 달라서 밀려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을 다스리며 아무 일 없는 척 생활 현장으로 복귀하는 일이다. 시인이 쓴 것처럼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고급스런 감정을 더듬어 보는데” 아들이 텔레비전을 켜놓고 소파의 주인인 양 앉아 있는 상황, 텔레비전의 장악력이 음악을 압도하는 가운데 조용한 음악은 조용한 아버지처럼 ‘꺼진(turned off)’ 상황이다. 다음 시에서는 조부-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3대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이로 미루어 아들은 “Z세대”다.
누구든 공평하게 단독자로 이 세계에 던져진다. 부모 슬하에서 성장기를 거치면서 아버지를 넘어서고자 할 때 비로소 사회에 나가 홀로 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긴다. 세상의 아들들은 아버지 극복 후 아버지가 되며, 결혼과 출산, 양육의 시기를 지나면 다시금 부부만 남게 된다. 장인환 시인은 어린 시절의 추억담을 시작으로, 한 인간의 생애 곡선을 따라 일어날 법한 일들을 이 시집에 매우 세심하게 담아내고 있다. 부부가 한마음으로 키운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문득 빈 공간이 생기고, 부부 사이를 부드럽게 매개해 주던 자녀가 그 자리에 없을 때 빈둥지 증후군을 앓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 세계에 홀로 던져진 자신을 다시금 자각하기에 이른다.
아름다운 꽃밭이 펼쳐지고 뒤로 보이는
쉼터에 가서 드러눕고 싶지만
바윗덩이 가슴에 담고
세상 속 동행자를 찾아보지만
한 명 한 명 왔다가 바라보고 사라진다
유창한 말도 사라진다
언제나 이 상황 끝이 나는지
기대하는 마음을 허공에 걸어둔다
늘 제자리다
오늘도 허허벌판에 하늘을 이고 서 있다
-「허수아비」 부분
자아상을 “허수아비”라 지칭하는 화자의 마음은 지금 허공에 걸려 있는 듯 허하기만 하다. 마음의 거처를 자기의 몸이 아니라 허공으로 보고 있다. 홀로 선 채,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동행자를 찾아보지만” 누구나 왔던 걸음으로 그냥 뒤돌아선다. 기다림과 기대가 한낱 허수아비 같은 자신에게서 피어올랐다 사라질 뿐이다. 세상은 온통 “허허벌판”이고, 화자의 자리는 “늘 제자리”여서 기대가 먼 곳까지 이르지 못한다. “아름다운 꽃밭이 펼쳐”진다 해도, “뒤로 보이는/ 쉼터”가 있다 해도 자유의지 발산은 생각으로 그친다. 꿈을 꾸는 일마저 제한된다면서 화자는 한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 결정되어 버린 정황을 이야기한다. 그에게는 조건 결정론에 저항하기 어려운 조건이 있는데 언제나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의 이름은 다름 아닌 “아비”다.
위의 시는 앉아 있어도 누워 있어도 아비일 수밖에 없는 자의 애환을 이야기한다. “힘줄이 울퉁불퉁” 불거지고, “허리춤에 대검”을 찬 모습, “입은 굳게 다물고 쉼 없이 조잘대는 것을/ 듣는 귀”를 가진 그는 자신보다는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앞에서부터 읽어온 대로 장인환 시는 장황한 레토릭을 동원하지 않고 솔직담백한 언어로 시적 상황을 구사한다. 아비로서, 남편으로서, 이웃으로서 애쓰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일 만큼 그는 진정 어린 마음으로 타자를 대한다. 여성의 목소리가 우세한 최근의 시에서 아버지의 솔직한 목소리를 듣는 건 매우 희귀한 시 읽기 경험이다. 아픔도 상처도 눈물도 없을 것처럼 강인해 보이는 아버지의 애환을 읽으면서, 여성주의 시가 앞서가는 시대에 뒷전으로 밀려 버린 남성 시의 현주소를 보게 된다. 상대적 타자인 남성과 여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의 조화로움을 위하여 장인환 시인이 용기 있는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이제 시인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자 한다.
만지면 감촉이 좋은
목각인형
손때가 묻어서 군데군데
거무스름한 윤기가 돌지만
아직도 나무 냄새가 난다
분리가 된 조각을
이젠 설명서가 없어도
척척 맞추지만
어렸을 때의 상상 속처럼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
아들도 가지고 놀지 않는
목각인형을 버려야 할까
가지고 있어야 할까
망설이다 버리기는 아까워
상자에 일기장과 함께
다시 보관해 둡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눌
어린 친구가 생기면
목각인형을 선물할 생각입니다
-「목각인형」 전문
되새겨 읽을수록 의미의 진폭이 커지는 시다. 목각인형, 일기장, 그리고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어린 친구”라는 구절에 화자의 심리 지층이 형성되어 있다. 우리의 마음을 애잔하게 하는 이 시 한 편만으로도 장인환 시인은 모든 말을 다 하고 있는 듯하다. 화자는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목각인형을 일기장과 함께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어린 친구가 생기기를 바라면서 그때까지 인형을 보관해 두겠다고 말한다. 아이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아이의 마음이 되어 혼잣말로라도 목각인형과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세계를 꿈꾼다. 라캉에 기대어 읽으면, 거울 속의 자신을 타자로 인식하는 그 순간에 자아상도 알게 되는데 그는 이것을 이마고(imago)라 칭하면서 최초의 이마고를 타자 인식의 원리로 보았다. 요컨대 자아 인식과 타자 발견의 동시성에 의한 환상 형성이 그것이다. 이후 자아는 타자에 대한 환상을 끊임없이 갖게 된다.
위의 시에서 목각인형을 화자의 이마고로 보면 그가 이야기 상대로 어린 친구를 기다리는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독백이 자신과의 대화인 것처럼 목각인형은 화자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성장기에 대화 상대였던 목각인형이 사실상 화자의 독백 대상으로서 이마고라는 점에서, 성인이 된 지금도 그는 이 장난감을 버릴 수가 없다. 일기장을 버리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일기의 독백체가 언어 기록물이라는 점과 목각인형의 상(像)을 같은 지평에 놓고 볼 때 이는 고스란히 화자의 언어, 화자의 자화상을 대신한다. 지금 화자가 바라는 바는 최초의 자화상 같은 어린 친구와의 만남이며, 그와 사람의 말로 소통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어린 친구를 기다리는 것은, 목각인형에게 했던 어린 시절의 말로써만 그 친구와 소통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타자의 신비로움을 처음 알게 된 그 날에 자아상도 보았던 어린 시절의 화자, 그리고 목각인형이 생겼을 때부터 나누었던 많은 말들은 분명 독백체였으리라. 그때 맡았던 나무 냄새를 아직도 품고 있는 인형을 어린 친구에게 선물해 주고 싶다는 화자에게는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불변하는 것이 있다. 자아는 타자성을 의식하면서부터 말로 소통하고자 한다는 것, 라캉의 언술대로라면, 주체가 형성되는 상징계에서는 주체들 간 상호작용에 어떤 식으로든 언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첫 시집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장인환 시인의 마음에 온세상이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에 목각인형의 나무 냄새를 품은 듯한 한 어린아이가 있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아무쪼록 아이처럼 투명하고 담백한 말로 소통하고자 하는 시심이 이후에도 내내 변하지 않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