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최고의 전략자산을 앞세운 패권 전쟁
미국-리쇼어링, 중국-기술 굴기, 대만-실리콘 방패 전략
이 시대 최고 전략자산은 반도체다. 스마트폰, 클라우드 컴퓨팅, 자율주행차, 데이터센터와 같은 첨단 산업뿐 아니라 유도미사일, 드론 등 군사 무기의 핵심 기반이 된다. 이제 반도체는 국가와 산업의 미래를 좌우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즉 무기화된 상호 의존성(Weaponized interdependence)으로 현대 지정학의 중심에 섰다. 따라서 반도체 산업을 조망할 때는 지정학이 중심 키워드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고 미국의 리쇼어링과 중국의 기술 굴기, 대만의 실리콘 방패 전략 등 반도체 패권 전쟁의 현실과 전개 방향을 검토하며 다극화 시대의 시사점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지정학의 미래를 논의해야 한다.
반도체 기술 혁신 로드맵
수요 흐름과 혁신 생태계를 재창조하는 고도의 프레임워크
반도체 기술 혁신 로드맵은 ‘미세화’를 중심으로 이른바 ‘무어의 법칙’이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리소그래피, 2차원·3차원 트랜지스터 기술 등이 미세화의 추진력이었다. EUV 기술 혁신, 플라즈마 광원, 초정밀 광학, 정밀 기계 제어 기술은 5nm 이하 미세화를 가능하게 했다.
수요 측면에서 시스템 산업은 기술 혁신을 견인하는 시장의 힘으로 작용했다. 이를 근간으로 하나의 실리콘 칩의 수천 개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수백만 개, 수억 개, 수백억 개로 확장할 수 있었다. 로드맵은 기술 개발과 수요 변화의 시간적 차이를 흡수했다. 속도가 빠르면 완급을 조절하고, 늦으면 혁신의 속도를 내면서 전반적인 혁신 속도를 유지했다. 이러한 조정 메커니즘은 반도체 산업 전반에서 투자·연구개발·사업화가 로드맵의 틀에 맞춰 정렬되도록 만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대 반도체 기술 로드맵의 결정적인 동력은 개인용 컴퓨터였다. 특히 마이크로프로세서 발명은 무어 법칙의 혁신을 수요 측면에서 촉진하는 변곡점이 되었으며 인텔을 세계적인 CPU 기술 기업으로 극적 전환시켰다. 또한, 스마트폰은 침체된 반도체 미세화 수요에 다시 탄력을 제공했다. 더 작고 더 전력을 작게 쓰는 ARM CPU를 통해 반도체 제조 기술이 발전했다. 또한, 3차원 구조인 FinFET과 GAA 기술을 통한 비선형적 혁신으로 미세화 장벽을 극복하며 원자 수준의 정밀도를 향해 도전에 나서고 있다.
반도체 비즈니스 모델과 생태계 진화
파운드리, 펩리스, IDM 모델 간 경쟁과 협력의 방정식
반도체 전장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혁신의 흐름을 읽고 비즈니스 모델을 새로 짜야 한다. 무어의 기술 로드맵도 비즈니스 모델로 연결되지 않았으면 허상에 불과했을 것이다. 타이밍을 맞춰 로드맵을 재편하는 노력도 필수이다. 기술 혁신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기업들은 ‘주변시’를 통해 바다 전체를 넓게 조망하고 기회를 포착하는 동시에 경쟁사를 ‘근접 관찰’하면서 앞서 나가야 한다.
TSMC는 순수 파운드리(pure-play foundry), 엔비디아는 펩리스를 각각 비즈니스 모델로 삼아 급성장과 성공을 구가했다. 이들의 진단과 미래 전망을 살펴보는 일이 긴요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IDM 모델을 채택하고 있다. IDM과 파운드리 모델 간에는 경쟁과 협력이 불가피하다. 이에 대해 로트카-볼테라(Lotka-Volterra) 방정식은 공진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2030년, 10억 장 웨이퍼, 1조 달러까지 성장할 반도체 글로벌 가치 사슬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무엇일지 주목해야 할 것이다.
AI 발전과 공진화하며 새로운 차원의 혁신을 열다
경계 없는 융합과 변화로 비선형적 혁신을 이어가는 반도체 생태계
AI는 반도체와 상호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AI 인프라 투자의 주된 대상이 AI 칩이며, AI 생태계에서 칩 분야가 가장 큰 수익을 내고 있다. AI 혁명의 기술적 두 축인 신경망 모델 알렉스넷(AlexNet)과 트랜스포머의 혁신은 데이터 및 연산 요구 증가로 GPU와 텐서 코어 같은 하드웨어 발전을 촉진했다. 이어서 AI 모델의 학습과 추론을 지원하는 하드웨어 아키텍처(GPU, TPU, NPU)가 발전했으며 그 과정에서 HBM과 PIM 같은 메모리 혁신이 이루어지며 AI 칩의 성능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에지 AI와 온디바이스 AI의 부상에 따라 반도체의 새로운 시장 기회가 제공되고 있다. 반도체와 AI, 두 가지 기술 혁신은 공진화의 흐름을 타고 있다.
반도체 강자들은 각기 개방형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CUDA 생태계와 이에 도전하는 AMD의 ROCm 생태계가 대표적이다. 이와 별도로 빅테크가 자체 반도체를 생산하는 맞춤형 ASIC 전략을 취하는 것도 주목할 양상이다. 한편, 우리나라 반도체 스타트업들의 혁신적 접근을 눈여겨보고 개방 생태계 내에서 성장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도 스타 팹리스가 등장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
반도체 기술은 새로운 장벽 앞에 섰다. AI가 부닥친 데이터 고갈 문제와 인간 수준의 추론 능력 확보 문제를 반도체 관점에서 풀어내야 한다. 스케일링 압박을 이기는 기술적 대안이 요구된다. 그런데 기술 혁신은 결코 선형적인 발전의 연속이 아니다. 이종 결합, 생물학적 통찰, 새로운 제조 공정과 같은 비선형적 혁신으로 전환되고 있다. 기존 한계를 뛰어넘어 기술 간 융합과 새로운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 에너지, 생물학, 센서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융합이 이루어지며 새로운 기회가 창출되고 있다.
칩렛 기술은 무어 법칙의 한계를 넘어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한다. 양자 컴퓨팅은 기존 컴퓨팅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에너지 소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 가능한 에너지 솔루션을 모색하고 있다. 생물학적 통찰은 기술 혁신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이러한 혁신 사례들은 기술이 발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융합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