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남해에 살며 자연을 읽고 삶을 쓰고 세월을 낚아 온 풍경들…
쓸수록 영혼의 시력이 높아지고
그릴수록 마음의 청력이 깊어졌다
시 쓰는 여인으로 남해에 깃들다
오십줄에 들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이인성 작가는 1998년, 52세 때 『문예한국』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여 꾸준히 시를 발표해 왔다. 작가가 처음 펴내는 이 책의 제목이 된 ‘바다보다 먼저 일어서는 파도’는 등단작 「낚시터에서」 중의 한 구절이다. 책의 말미에 실린 심사평에서도 이 대목이 언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의 두 번째 연에서 “퍼렇게 눈 뜬 생명을/ 거품처럼 날리는/ 장대 끝에 걸어놓고”라는 쓴 것처럼, 작가 역시 갓 시인이 된 그 시절의 자신 역시 퍼렇게 눈 뜬 젊은 날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이 아닐까. 그런 의문을 갖기 무섭게 “하늘 비비며 돌아눕는 저승의 수평선을 보았다”라고 끝맺는 대목에 이르면, 이제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다고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 어느새 죽음을 의식하는 나이에 이르렀지만 바다 위 수평선을 보면서 “하늘 비비며 돌아눕는” 파도의 선택을 지지하기로 한 작가의 마음이 읽힌다.
1999년에 작가는 자녀들이 독립하고 남편이 직장에서 퇴직한 것을 계기로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남해로 이주했다. 바다가 매일 새롭게 푸른 이유가 “파도의 쉼 없는 닦달”(「어느 겨울」 중) 때문이듯 새로운 터전에서의 생활도 스스로를 닦달하지 않으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펜션을 운영하고 일상을 견디면서 쌓인 마음의 때를 비수기마다의 긴 여행으로 씻어내야 했다. 그러다 손님 치르는 일도, 여행도 체력적으로 힘든 시기가 벼락처럼 찾아왔다. 다시 새로운 출발점이 필요했던 시기에 다가온 것은 그림이었다.
일흔 하나, 그림을 시작하다
어느 날 가까이 지내던 이웃이 찾아와 ‘모네의 화실’에 같이 가자고 청해 무심결에 따라나섰다가 회원으로 등록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그이듬해엔 회장직까지 맡게 된다. 그림을 처음 그려보았다고 하기에는 그녀 인생에 그림에 얽힌 사연이 적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대표로 사생대회에 불려 나가느라 바빴고 남편과도 그림이라는 취미를 통해 깊어졌다고.
많은 이가 어린 시절에 막연히 동경하는 시인의 꿈, 화가의 꿈은 소녀 시절의 이인성에게도 “너무 높아 닿을 수 없는 푸른 푸른 꿈들”(「노년의 길」 중)일 뿐이었다. 하지만 결혼생활의 과업들이 대략 마무리되고 나이 오십이 넘어서 시인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시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품고 사는 기쁨을 경험한 이가 화가의 꿈인들 못 이룰까. “꿈으로만 맴돌다 빛바랜 나뭇잎”이 “흐릿해진 하늘 아래로 되돌아” 나온다고 표현하고 있듯이 작가는 잊었던 꿈이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며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꿈들에게 자신의 시간과 자리를 조금씩 내어주며 새로운 걸음마를 시작한 것이다. 먼 옛날 “어린 잎 조용히 안고/ 얼은 몸 가누며” 움츠렸던 시간들이 뒤늦게나마 겨울이라는 감옥에서 풀려나와 작가의 발 밑에 푸른 잔디를 깔아주었다. “얼음보다 찬 바람이 가지 끝에 쉬고”라고 쓰고 있듯 눈밭을 맨발로 걷는 듯 몸과 마음이 시렸던 과거의 시간이 가슴속에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지만 그 속에도 “따뜻한 고요가 머무름 없이 다가오는 봄빛”이 함께 준비되어 있었음을, 여든의 생은 나직이 고백한다.
작가의 시 옆에서 독자의 시선을 붙드는 그림들은 선명하고 호쾌한 색채를 자랑한다. 흐린 날씨라는 커튼을 젖혀내어 이 세계의 원본을 꿰뚫어 보는 작가의 남다른 시선이 “바다보다 큰 구름/ 파도 위에 누워 있네”(「겨울초」 중)라는 대목에도 숨은 듯 새겨져 있다. 작가의 시어는 한 장의 사진이 프레임을 벗어나 유영하는 듯 이미지로 일렁이고 작가의 붓길에서는 시의 뼈대가 느껴진다. 세상이 거친 줄 알면서도 기어이 피어나는 꽃들의 맹렬함, 속절없이 지면서도 끝까지 저항하는 낙엽들의 기상, 거친 껍질 속에 감춘 내면의 향기를 사계절 발산하는 소나무의 다사로움, 해저에서부터 햇살을 향해 올라와 대기중에 산산이 부서진 물방울들의 잔해를 품은 바람들⋯ 저마다 무슨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일까, 그림쪽으로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작가 특유의 강인한 붓길 속에 보드라운 사랑을 수줍게 감춘 작가의 내면이 읽히는 그림들이다.
무자비한 세월 곁에서 건져올린 삶의 흔적들
작가의 무의식에서는 늘 어두운 소리가 울렸다. 해방 후 태어난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은 “삶이 죽음이었던/ 밤보다 훨씬 앞선 어둠 속에서/ 언제나 울리고 있는 발자국 소리들”(「어느 날」 중)이라는, 또렷한 공포의 감각을 남겼다. 그 어두운 짐을 기억 속에 싣고 있었기에 윤슬이 별처럼 찬란히 빛나는 바다 곁을 그렇게나 서성거렸는지도 모른다. 발자국 소리는 파도소리로 지워내고 어둠은 태양빛으로 밝히려고⋯. 그러나 작가는 어둠 속 멀리에서 반짝이는 작은 등불을 더 사랑했다. 인생이 암흑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의지해 온 그 작은 등불들은 어둠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존재감도 없었을 것이다.
현실보다 앞서 보채곤 했던 불안의 그늘은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았고, 애정이 고팠던 아이의 시간이 고스란히 기록된 얼굴에는 입술을 앙다문 흔적이 남겨졌다. “별도 달도 저 바다도/ 알 수 없는 너와 나의 서러운 삶/ 어찌 잊을 수 있을까”(「떠나버린」 중)라며 옛 기억을 꺼내보지만 그런 기억을 공유한 ‘너’는 이제 없다. 그렇게 ‘너와 나’가 때론 함께였던 서러운 삶의 길에서 마침내 ‘너’를 떠나보낸 후로 작가는 알게 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상실과 포기, 체념의 순간들은 그녀가 결코 놓을 수 없는 것을 놓아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연습이었음을.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달/ 내가 먼저 달을 놓아버린다”(「보름달」 중). 이제 또 무엇을 잃을지 무엇을 다시 놓아버리게 될지 모르지만 오늘은 오늘 일어서는 파도를 보고, 오늘 들려주는 노래를 기록하고, 오늘 지은 시 한 편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라도 잔혹한 속도로 빠져나가는 시간을 움켜쥐어야 했던 생의 고뇌가 그녀의 시 곳곳에서 앵강만 방파제에 부딪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거대한 바다가 떠받치고 있기에 파도는 하늘에다 대고 기분껏 재채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십 줄의 작가가 처음 썼던 것처럼, 바다보다는 언제나 파도가 먼저인 것이다. 쉼없이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파도의 멈추지 않는 몸부림이 있기에 바다는 썩지 않고 나날이 새로울 수 있다. “저승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 길은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낙엽과 상실의 계절을 밟아가다 4장 ‘겨울 홍현 마을’에 이르면 다시 흐드러진 봄의 빛 속에 이른다.
시인 이인성의 시에 화가 이인성의 그림을 삽화처럼 곁들여 꾸민 이 책은 작가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작가의 80년 인생에 작은 기념품을 선사하기 위해 마음을 모아 만든 소박한 결과물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서양사학자 노성두가 시적인 글로 화가 이인성의 초상을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