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은 하늘이 내리지만, 지도자는 참모가 만든다.
왕조의 교체는 패러다임의 교체였다. 그 교체는 대부분 뛰어난 창업주와 핵심 참모들의 위대한 협업으로 이뤄져 왔다. 이때 필요한 것은 시대와 민심을 읽는 식견과 과감한 실행력이다. 주몽을 옹립해 고구려를 창건하고 아들 온조와 백제마저 창건한 철의 여인, 소서노가 그랬다. 새로운 시각으로 창조적인 길을 제시하는 참모를 곁에 두면 패러다임을 전환할 힘을 얻게 된다.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는 목숨 바쳐 충성한 뒤, 대의를 위해 요직을 사양하고 백의종군한 만고의 충신들이 있었다. 대권을 위해서는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과 같은 참모를 반드시 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주류 집단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잠재우지 못하면 두고두고 화를 입는다.
삼국 통일을 이룬 김춘추와 김유신은 비주류 왕족과 귀족이었다. 가야 출신의 김유신과 몰락한 왕족의 자손 김춘추는 신라 지배층의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선덕왕과 함께 신라의 체질을 바꾸었고, 이는 삼국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지도자와 참모가 경계해야 할 권력의 숨은 속성 또한 분명하게 보여준다. 권력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서 길을 잃은 지배층이 국가와 공동체를 나락으로 빠트리는 경우는 현재까지도 반복된다. 왕건의 유지를 받들어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던 천추태후는 사대주의 귀족 세력에게 실각당한다. 성종과 최승로의 굴종 외교는 결국 거란 침입의 전란을 남겼다.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었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라도 민심을 얻을 정책이 부족하면 통치는 불가능하다.
조선 창업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성계를 옹위한 것이 아니라, 귀족 중심의 토지 제도를 개혁해 민심을 돌려놓은 데 있었다. 정도전에겐 권력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권력으로 이루려는 이념, 그리고 그 이념을 실현할 정책의 시행이 최우선 과제였다. 즉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을 돌보겠다는 그의 이념과 그 실현은 결국, 고려의 문을 닫고 조선의 문을 연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통치란 민심이 원하는 것을 정책으로 구체화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실천하는 행위임을 정도전은 말하고 있다.
상징적 정책의 효능감을 위해서는 불도저형 참모가 반드시 필요하다.
뚝심 하나로 신생국 조선의 왕궁과 도성을 건축해낸 무명 병졸 출신의 공조판서 박자청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조선의 사대부는 양반 출신이 아닌 박자청을 판서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데 총력을 다했다. 그러나 태종과 세종은 박자청의 건축과 토목의 실무 능력을 높이 사 끝내 중용했다. 한 사회의 역동성은 우직하고 강단 있는 전문 분야의 참모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박자청은 말해준다.
자기 정치에 욕심이 없는 실력 있는 원칙주의자를 전면에 배치하라.
누구나 아는 황희는 법과 원칙에 따라 깊이 생각하고 멀리 고려하며 네 명의 왕을 모신 행정의 달인이었다. 신생 국가 조선의 법치주의 시스템을 세우려던 태종에게 꼭 필요했던 인물이었고, 세종과의 협업을 통해 조선의 문민 통치 기반을 다진 주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늘 스스로 낮추었다. 반대로 집안 여인을 명나라 후궁으로 바쳐 그 후광으로 조선 정가를 휘두르던 한확의 여식, 인수대비의 사리사욕은 결국 연산군 사화로 이어지는 비극을 낳았고 조선은 세도 정치의 폐해 속에서 나라 발전이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인수대비의 사례는 특정 세력의 눈치를 보는 인사 정책은 반드시 실패함을 알려준다.
궁지에 몰렸을 때 민의를 배신하지 않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문관 출신으로 조명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가, 청나라에 포로로 잡힌 도원수 강홍립은 적지에서도 백성을 위해 충의를 지켜 결국 후대에 광해군을 외교 정책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저무는 명나라와 떠오르는 청나라 사이에서 길을 잃은 조선의 정치권은 친명 사대주의 세력과 실리 외교를 주장한 광해군 사이에 수많은 논쟁이 오갔다. 친명 사대주의 세력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이 끌어내리고 인조를 세웠으나,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고, 그 사이 국토는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국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에 누군가는 목숨을 내놓고 미쳐야 한다.
조선에선 수수료가 세금보다 비싼 방납의 폐해를 백성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다. 이를 혁파할 새로운 조세 제도가 대동법이었는데, 양반 사대부는 대동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조와 효종 대에 걸쳐 김육은 기득권 세력의 견제에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 끝끝내 대동법을 추진했던 경제통 참모였다. 직을 걸고 대동법을 국가의 주요 의제로 올려놓았으며 부패의 사슬을 끊어내, 국고를 채우고 백성을 살리려는 필사의 노력을 평생에 걸쳐 진행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결국 대동법의 시행은 확대되어, 경신(庚辛) 대기근 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조선 후기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라를 위해 누군가는 목숨을 내놓고 미쳐야 한다. 한편 이 책은 이덕일의 『왕과 나』(역사의 아침, 2013)을 증편·개편해 새롭게 출간한 책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