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영웅이나 천재는 없다!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가 함께 쓴, 신화 없는 진짜 과학 이야기
학술 활동뿐만 아니라 대중 과학 교양서, 과학 잡지, 방송, 유튜브 등을 통해 과학에 대한 진실된 상을 전달하는 작업을 해 온 과학사학자 박민아, 이두갑, 과학철학자 이상욱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을 만든 과학의 역사, 그 ‘결정적 순간들’을 발굴한다. 결정적 순간들이라는 명명은 천재 과학자의 위대한 발견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이 책은 그 반대다. 과학의 역사를 세밀히 조사해 보면 그런 순간들은 극히 일부였다. 역사에 족적을 남긴 과학자들은 약점 많고 인정을 갈구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그들은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 및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 동떨어질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외부적 요인에 흔들려 타협하거나 굴복하거나 저항하거나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세계를 어제와 다르게 했다. 요컨대 과학의 결정적 순간들이란 이런 평범한 날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이 책은 갈릴레이 갈릴레오, 윌리엄 톰슨, 마이클 패러데이, 제임스 맥스웰, 루트비히 볼츠만, 막스 플랑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마리 퀴리, 앨런 튜링,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등 과학사에서 굵직굵직한 인물들의 신화를 벗겨 내고 잘 알려지지 않은 결정적 순간들을 들춘다.
갈릴레오는 정말 교회와 사이가 나빴을까? 사회적 분위기야 어떻든 자신의 이론을 고수하는 외골수였을까? 그렇지 않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천문 체계를 옹호하는 《두 주요 세계 체계에 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Two Chief World Systems》를 출판하면서 교회와 지속적으로 소통했고 과학적 주장과 사회적 수용성을 동시에 조화시키려 한 영민한 야심가였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했다는 이유만으로 종교재판을 받지 않았으며 종교의 희생양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코페르니쿠스주의는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은 적이 없다. 왜 종교재판이 열렸는지 이해하려면 갈릴레오가 과학자로서 가졌던 진짜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야 한다. 과학철학자 이상욱은 여러 사료와 기록을 통해 갈릴레오의 진짜 이야기를 다시 들려준다.
이 책에는 우리 상식을 깨는 이런 흥미로운 역사 탐구가 가득하다. 막스 플랑크는 흑체복사를 연구하면서 에너지가 띄엄띄엄한 값으로 양자화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 이른바 양자물리학의 시대를 열었는가? 안타깝게도 양자물리학의 시초에 대한 이런 ‘표준적’ 설명은 잘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플랑크는 에너지의 양자화를 그저 수학적 기법이라고만 생각했지 세계의 실재라고 보지 않았다. 이런 불일치 역시 플랑크가 살았던 독일 사회 및 독일 물리학계가 플랑크에게 끼쳤던 영향을 파악해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계를 냉전으로 몰아갔으나 핵물리학 연구는 꽃 피웠던 2차 세계대전 시기 하이젠베르크, 오토 한, 카를 폰 바이츠제커 등 독일 물리학자들의 원자폭탄 개발 에피소드는 사회와 유리된 고고한 과학자 신화에 흠집을 내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치를 위한 전쟁 연구에 반대하기 위해 일부러 태업을 하며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않았다는 하이젠베르크의 주장은 변명일까, 사실일까? 하이젠베르크는 정말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저자들은 독일 과학자들의 녹취록 분석을 통해 그 진실을 파헤친다.
오늘의 세계를 만든 건 무명의 과학자다
더 많이 알려져야 할 과학자 발굴하기
과학사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 과학자들만이 세계를 이런 모습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과학사에는 여성이어서, 물리학이 아니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와 그들의 중요한 연구가 있다. 헨리에타 리비트, 애니 점프 캐넌,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 로절린드 프랭클린, 비토 볼테라, 베리 커머너 등 그동안 국내 과학 교양 서적에서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과학자들이다. 이 중에는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도 있다. 누군지 모르겠다고? 바로 원자핵을 연구한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다. 아마 마리아 메이어가 여성이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마리아 메이어는 과학자와 현모양처라는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고 남편은 교수였으나 자신은 ‘자원봉사 조교수’라는 무보수직에 만족해야 했다. 마리아 메이어를 노벨상 과학자로 만든 결정적 순간은 그녀에게 일자리와 첫 봉급이 주어졌을 때다. 그때에야 비로소 원자 껍질 모형을 제시하며 어떻게 원자가 그렇게 안정적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의 답을 찾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문학을 하기 위해선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처럼 마리아 메이어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부터 제대로 봉급을 받으면서, 다시 말하면 독립 연구자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연구는 제대로 된 성과를 냈다. 독립 연구자로서의 학문적, 사회적 지위의 확보는 생산성 있는 연구를 위해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175쪽)
하버드 천문대에서 별의 밝기를 기록해 천체물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헨리에타 리비트와 애니 캐넌의 연구도 사실 남성 과학자들이 별빛 스펙트럼 분류를 가치가 낮은 일로 여겼기에 가능했다. 이 여성 과학자들은 ‘컴퓨터’로 불렸는데 이는 대량 생산되는 항성 스펙트럼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저임금으로 고용된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였다. 당시 남성 조수는 평균 2500달러의 연봉을 받는 반면 하버드 여성 컴퓨터는 시간당 25~35센트, 연봉으로는 600~900달러를 받았다. 그런데도 세상을 바꾼 것은 여성 컴퓨터들의 연구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제임스 왓슨의 DNA 발견 수기인《이중나선》 때문에 이중나선의 증거가 된 DNA X선 회절 사진을 찍어놓고도 발견의 공을 도난당했다고 알려진 로절린드 프랭클린도 사실 비운의 여성 과학자는 아니었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연구의 공을 뺏겼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의 구조를 해석하는 선구자로서 엄청난 업적을 냈으며 죽기 전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외에도 생물의 생존 경쟁을 수학화함으로써 진화와 생태계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는 수리생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비토 볼테라, 1960년대 방사성 물질 낙진 위험 연구를 통해 환경 위기를 경고하고 환경 운동에까지 나아간 과학자 베리 커머너 등 저자들이 꼽은 세계를 바꾼 과학자들의 에피소드는 우리가 지금 고민하는 문제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 준다.
과학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 활동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방식
우리가 너무나 인간적이고 약점 많은 과학자의 삶을 통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은 도대체 과학이란 무엇이며, 과학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를테면 과학의 역사와 과학자의 삶에 기반해 과학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하는 과학철학적 숙고라고 할 수 있겠다. 과학자는 시대와 사회, 자신이 발 딛은 근접 환경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과학자들이 기존 패러다임 내에서만 작업하고 패러다임을 전복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패러다임 내에서 작업하기에 패러다임을 깰 수 있었다. 물론 그 자신은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 있지만 말이다. ‘힘의 선’이라는 개념을 창안함으로써 뉴턴식의 직선적 인력이나 척력으로 된 원거리 작용 패러다임을 깼던 패러데이는 뉴턴주의적 세계관 안에서 연구했다. 그런 패러데이를 세계관의 혁명가로 만든 결정적 요인은 외부 환경에 있었다. 가난한 대장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인쇄소의 제본공 도제였던 패러데이는 책을 만들며 독학으로 과학 이론을 배웠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과학 엘리트들이 저술했던, 수학이 난무한 어려운 과학책은 이해하지 못했다. 수학적 테크닉이 없었기에 힘의 선이 보여 주는 회전 운동을 직선의 원거리 작용으로 환원하지 못했고 그 대신 힘의 선을 시각적으로 입증하는 실험에 열을 올렸다. 다양한 전기 현상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려는 패러데이의 전략은 힘의 선과 전기장, 자기장 개념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바로 그 수학이 패러데이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자기력선이 공간에 물리적으로 실재하고 그 선을 따라 힘이 전달된다면 그 힘이 전달되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원거리 작용에서는 힘이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데 비해, 자기력선을 통해 힘이 전달된다면 힘이 전달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인가? 자기력선이 물리적 실재라면 자기력선이 펼쳐져 있는 그 공간에는 에너지가 실려 있을까? 그 에너지의 크기는 얼마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현상을 보여 주는 실험만으로는 부족했다.”(44쪽) 이는 수학으로 무장한 신세대 물리학자의 몫으로 남는다. 패러데이의 후예 맥스웰이 위대한 과학자가 된 건 이런 상황적 맥락이 있었다.
스탠퍼드대학에 DNA학과를 만든 생화학자 아서 콘버그는 과학 활동이 고립된 천재의 의로운 싸움이 아니라는 점을 적확하게 입증한다. 콘버그는 발견에 대한 우선권을 놓고 과학자 간 경쟁이 격화되는 비밀주의와 고립주의가 과학 발전에 좋지 않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가 자신의 학과에 정착시킨 문화가 ‘열린 냉장고’ 설치이다. 이 냉장고에 콘버그 자신의 실험실에서 생산한, DNA 뉴클레오타이드 및 DNA의 합성과 분해에 관여하는 효소들을 넣고 이를 DNA를 연구하는 국립보건원의 연구자들이 모두 이용할 수 있도록 공유했다. “콘버그는 이러한 공유 문화를 통해 자신의 실험실이 더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공유의 연구 공동체가 기존의 연구 질문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이를 독창적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창의적인 실험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을 때, 기초 과학이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이 점차 부상했다.”(230~231쪽) 이는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콘버그는 생화학 연구를 다학제적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분자생물학 여러 분과의 신진 학자들을 임용했다. “이런 배경에서 신임 교수는 과학적으로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점차 중요한 연구 주제를 개척하거나 창의적인 업적을 발표했다. 자원의 공유를 통해 성장한 이들은 또한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와 책임감이라는 상호 호혜의 원칙하에 자신이 많은 연구비를 받을 때에도 이를 기꺼이 학과 구성원과 공유하면서 생화학학과라는 실험 공동체의 성장에 기여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적 구조이다.”(232~2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