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떠돌며 인의 사상을 설파한 철학자
노나라와 공자
노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지금의 중국 산둥성 지역에 근거를 둔 나라다. 노나라를 설명할 때 공자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공자와 노나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공자가 승전의 직책을 맡고 있을 당시 노나라는 소공이 겨우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모르는 상태였고, 실질적인 정권은 모두 ‘계손, 숙손, 맹손’이라고 하는 삼환의 수중에 장악되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제나라 등에서 활동하던 공자는 51세 때 노나라의 중도라고 하는 고을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바른 정치를 시작했다. 당시 노나라 임금인 정공은 공자에게 일약 사공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사공의 직책에 있으면서 공자는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자 정공은 공자를 사구의 자리에 임명하고 재상으로서의 실권을 부여했다. 사구의 자리에 오른 공자는 사법과 행정, 외교의 분야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고, 노나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노나라가 이와 같이 발전하자 이웃하고 있던 제나라에서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해, 공자를 노나라에서 떠나게 할 계략을 꾸몄다. 이 꾐에 빠진 정공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공자가 바로 잡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결국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고 이때부터 노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나라
시조는 강태공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과 그의 아들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킨 공으로 제나라 땅을 봉토로 얻었다. 그 때문에 강태공은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고 제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이 되었다.
춘추 전국 시대에서 제나라는 제위왕, 제선왕, 제민왕 등이 다스린 초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진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 나라로 알려졌다. 인구가 많고 상업이 발달했으며, 화북 지방에 위치해 상당히 중화적인 문화가 강했다. 특히 해안 지방을 끼고 있어서 고조선과의 무역도 활발했다고 전해진다. 제나라에서는 관자와 손자를 비롯한 학자, 사상가들이 법가와 병가의 사상을 발달시켰다. 무역이 발달한 나라답게 현실주의와 실용주의, 이해득실 등의 사상이 중시된 나라였다.
진(秦)나라
중국 주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로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기원전 221~기원전 207)이다. 진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로, 장양왕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후에 6국을 멸망시키고 전 중국을 통일하여, ‘시황제(최초의 황제라는 뜻)’라 일컬었다. 왕의 자리에 25년, 황제의 자리에 12년간 있었다. 49세에 병으로 죽었다.
진의 통일로 오랫동안 제후들의 혼전이 끊이지 않던 국면이 종식됨으로써,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고 생산력은 증대되었다. 시황제는 진 왕조의 통치가 만대에 걸쳐 지속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모든 정무를 황제가 결재하는 삼공구경제를 시행했다. 또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어, 군 아래에는 현을 설치하는 군현제를 만들었고 도량형과 화폐, 문자를 통일했으며, 도로를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 체계를 강화했다.
농민을 징발하여 진, 조, 연나라의 북방에 있던 장성을 연결하고 동서로 더욱 확장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만리장성이다. 당시 전국에서 병역과 부역으로 징집된 인원이 무려 150여만 명에 달했으며, 남자가 부족하면 여자들도 보급 물자 수송에 잡혀갔다. 이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 갔다. 시황제의 통치 시기에는 법률도 대단히 엄격하고 가혹했다. 한 사람으로 인해 가족과 친지들이 처형당하는 ‘족주’와 온 마을이 처형을 당하는 ‘연좌’가 성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