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심리치료의 원형을 세우다
정신분석학을 창안한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어떤 사람일까? 성 이론에 집착하는 외골수? 구개암 진단에도 시가를 끊지 못한 골초?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본 비관주의자? 분명한 사실은 그가 무의식이란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확장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이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의식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말한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인간의 정신에 대한 과학으로 내세운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의사이던 그는 신체 질환의 원인은 전부 생리학적이라는 당대의 패러다임을 깨고, 환자들이 무의식에 숨은 정신적 병인을 의식하고 이야기하면 치유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치료자로서뿐만 아니라 계속 영감을 주는 문화 이론가로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도 허점이 있다. 성도덕이 엄격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상황을 간과한 것과 개인의 사례를 일반화한 것은 치료법의 효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비교하는 현대 의학의 기준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렵다. 저자는 프로이트가 “영혼의 실재를 환상 없이 해명한다면서도 자신의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
정신분석학이 과학적 심리치료가 되기까지
프로이트는 자신의 학설을 방어하려고 측근들을 중심으로 ‘비밀위원회"를 만든다. 저자는 만약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그랬다면 어떨지 상상한다. 만약 그가 우주에 대한 자기 견해를 전파하기 위해 닐스 보어, 막스 플랑크 같은 동료들을 비밀리에 소집해 충성 서약을 요구했다면? 우리는 이런 이론을 과학적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은 검증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주장하든 현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최선의 이론이고, 더 효과적인 이론이 나오면 자리를 내준다. 인간의 정신에 대한 과학 이론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말대로 “자신의 이론이 옳다고 확신할수록 의심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고자 하는 충동도 커질 수 있다". 이런 모순은 프로이트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에 대립각을 세운 심리학자 존 왓슨도, 정신분석학에 기초한 게슈탈트 치료의 개척자 프리츠 페를스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람들은 누군가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신봉하는 이론을 버리지 않으며, 오히려 증거를 의심하거나 임시방편으로 그 이론을 구하려 한다. 관점을 바꾸려면 그동안 내가 믿은 바가 옳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어려운 용기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떠난 망명, 암 투병, 딸과 어린 손자의 죽음을 겪은 뒤 인간에게는 죽음과 파괴의 욕동 또한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손자가 사망한 상실감을 견딜 수 없다고 지인에게 편지로 털어놓는 그의 모습에서 어쩔 수 없는 삶의 비애가 느껴진다. 정신적 치유와 행복을 자기 척도로만 규정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존재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저자는 근거를 바탕으로 이들의 업적과 한계를 균형 있게 평가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역시 정신분석학에 뿌리를 둔, 인간주의 심리치료의 거목 칼 로저스는 치료의 원칙으로 환자와의 일치, 그에 대한 수용, 공감을 꼽았다. 로저스에게 치료받은 사람은 인간적 허물을 털어놔도 이해하는 그가 “내가 그렇게 나쁘고 미치지는 않았나 보다"고 느끼게 해준다고 말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심리치료 효과의 절반 정도는 공감해주는 치료자에 대한 이런 믿음, 즉 플라세보 효과에 기반한다. 또한 로저스는 자기 치료법을 엄격하게 검증하는 것이 발전에 도움이 된다며 과학적 연구에도 충실했다. 그는 지금도 존경받는 심리치료자로 남았다.
20세기는 정신분석학의 세기였다. 이 학문을 추종하거나 비판하거나 극복한 사람들 모두가 궁극적으로 그 자장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각자 자기만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를 동력 삼아 인간을 이해하고 영혼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했다. 그 결과가 현대의 심리치료이고, 역사는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업적을 기억한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언제나 별이 빛나고 있듯 혼란스러운 때에도 역사를 들여다보면 먼저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으며, 이런 이야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좋은 학문, 좋은 심리치료란 무엇일까? 그리고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