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은 조선유학의 분수령이다. 한국성리학은 이황이 제안한 ‘리발’에 대한 해석사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리발을 정점으로 여러 갈래의 학파들이 형성되고, 각 학파는 저마다의 논리로 리발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때때로 논리의 전개 과정에서 논거의 신빙성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고, 이를 빌미로 상대 학파와 논박하기에 이른다. 이런 논박의 과정을 거치면서 학파에 대한 자부심과 학문적 위상이 제고되고, 또 다른 성격의 학문공동체가 형성된다. 처음 학파가 성립할 때는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형성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리적인 연고가 엷어지기도 했다. 성리학이 조선에 유입되면서 이론의 물줄기는 이황에게 모아졌고, 다시 이황으로부터 이론의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그가 제출한 리기호발에 대한 해석을 두고 긴 여정을 거치는 동안 학파 간 치열한 논변이 이어졌다. 이 여정을 통해 유학의 완성이라 할 정도로 조선성리학은 학문적 비약과 발전을 이룬다. 약 오백 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 해석에 대한 논박이 진행 중이며 유효하다.
리발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이 있다. 그 하나는 리가 무엇인가 이고, 다른 하나는 발이 무엇이냐 이다. 리와 발, 이 두 가지는 명사와 동사라는 이질적인 요소로 결합되어 있다. 동양의 철학 개념어는 대개 서로 짝을 이루어 의미를 만드는 것에 비해, 리발은 명사를 수식하거나 동사에 의지하는 관계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리에 초점을 두었다. 리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고 자신이 고안한 해석 틀을 정당화하기 위해 텍스트의 전거로 논증한다. 해석의 차이나 입장으로 인해 학파가 분화되고 정치적 집단으로 발전하여 종래 붕당을 형성하기도 했다.
조선은 인문학의 꽃이 만개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유학이 중심에 있었고, 성리학이 학계를 주도하는데, 그 명제는 본성을 리로 규정하고 있다. 그만큼 리가 중요하고 절대적이며 진리이다. 이 진리가 시대를 비추는 창이 되었다. 이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진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기준으로 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리가 어떤 상태로 있느냐 아니면 어디에 있느냐 등의 문제로 확대하면 리는 새로운 영역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본다면, 리는 성리학의 생명이자 근원지이다.
그러나 발이란 동사는 그저 리를 수식하는 역할로 제한되어 왔다. 리 자체에 발이 있느냐 여부에 초점을 두다 보니, 발이 가진 본래의 의미는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발이란 동사에 주목하면, 리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복잡한 이론들이 집합과 교집합 관계에서 리를 해석하게 만든다. 발에 긍정과 부정이 겹쳐지기도 하고, 아예 긍정만 하는가 하면 부정만 하고, 또한 공통분모를 도출하여 절충적인 입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때 ‘발은 리를 수식하는 관계를 넘어 주체적인 역할’로 변모한다. 이러한 리발이 한국유학사를 관통하고 있으며, 그 관통의 방식은 발이란 동사에 무게추가 실리면서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리와 발이 내용상 동일한 비중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발이 갖는 요소로 인해 리의 영역이 확대되고 발전하고 있다.
리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은 기존의 이황성리학에 대한 선입감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선입감은 이황성리학에 대한 왜곡이다. 혹자는 이황이 주희의 가장 충실한 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이황 자신이 부끄러워할 만한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며, 리기호발설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고 한계를 지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부 역사학자는 편향된 시각으로 이황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이이를 정점에 두고 이황의 입장을 서술하는 경우가 그렇다. 기존에 출판된 한국유학사의 책에서도 이황의 리발을 가치론적으로는 이해 가능하나, 사실적 명제에서는 논리적 모순이 있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16세기에 활동했던 이황은 리발과 같은 역동적인 담론을 제출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인의 사유를 보여준다. 이것은 오랜 사색과 불후의 정신으로 만든 이론이자 집합체이다. 이것이 리발이다. ‘리발은 역동적인 시대의 담론으로 제출한 성리학의 명제’이다. 이 명제는 16세기 엄혹한 시대를 건너는 유학자로서 이황은 진리를 시대정신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 책은 리발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탐구하며, 리발을 긍정하는 입장과 부정하는 입장을 비교 분석한다. 여기에서는 리발의 발을 긍정하는 입장을 ‘실발’로, 부정하는 입장을 ‘허발’로 구분하여 논의한다. 다시 말해, 이황이 제출한 리발의 발에 중점을 두어 ‘허발’과 ‘실발’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발이 갖는 의미는 발동, 능동, 조작, 발현 등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다. 발이란 비트켄슈타인의 언설을 빌리면,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Die Welt ist alles, was der Fall ist.)”로 유비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세계는 발의 모든 것이다. 세계는 진리가 죽어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일어나는 역동적인 세계이다. 그 세계의 원리도 역동성의 원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황은 리도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주지하다시피, 성리학에서는 세계 존재일반을 리와 기로 설명한다. 심성론으로 좁혀 보면, 리와 기가 발하는 것을 두고 이황은 리도 발한다고 본다.
이하의 책의 전개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Ⅰ장은 일종의 예비적 고찰로서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전체적인 맥락을 서술하여 책의 대체를 잡아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성리학에서 왜 리발이 중요한지와 리발의 문제를 이 시점에 제기하는지를 살펴보고, 기존 연구 성과에 대해 냉철한 눈으로 분석·검토 한다. 또한, 이 책에서 처음으로 제시하는 ‘허발’과 ‘실발’의 용어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하였다. 2장에서는 리발에서 핵심적인 문제로 부각된 ‘리’와 ‘발’자의 의미를 초기 유가 경전을 중심으로 문헌학적 자의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고, 이 낱글자가 철학적 전화를 하는 과정을 시대별로 살펴본다. 요컨대, 발은 일반적으로 ‘움직인다’로 해석되며, 이때의 ‘움직인다’라는 단어는 동動에 해당한다. 움직임에 상대되는 정靜자를 문헌학적으로 고찰하고 그 용례를 살펴본다. 선진 유학에서 파생된 동정이 송학에서 본격적인 철학의 개념으로 등장하는데, 이른바 동정·체용론이 그것이다. 일상적인 낱글자 어휘가 철학의 중심어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북송오자를 비롯한 주희성리학을 집중 분석하며 송대에 우주와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을 알아본다. 특히 주희의 리에 대한 관점을 ‘허발’과 ‘실발’의 두 관점이 있음을 규정하고, 허발의 측면과 실발의 측면을 다루고자 한다. 여기에서 리가 어떻게 태극의 생성 문제와 더불어 리의 동정 문제에 연관이 있는 지를 짚어볼 것이다. 또한 감정의 문제에서 리발의 가능성을 실발적 차원에서 고찰한다.
4장과 5장에서는 조선조 성리학의 거두인 이황을 비롯하여, 이이의 성리학적 쟁점인 리발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부한다. 리발에 대한 이황의 입장이 ‘실발’을 상정한 개념이라면, 이이의 입장은 ‘허발’임을 논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희성리학이 조선에 유입되어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황은 주희성리학의 ‘실발적 측면’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논리를 제시한 반면, 이이는 주희성리학의 ‘허발적 측면’을 자신의 이론으로 삼아서 리발을 ‘허발’로 규정하고, 오직 기발만이 ‘실발’임을 인정하는 것을 알아본다. 6장과 7장에서는 이황·이이 이후의 학파들이 리발을 어떻게 정립하고 전승해 가는지를 추적한다. 각 학파의 직계 제자들은 스승의 이론을 원형대로 고수하고자 하는 반면, 방계 제자들은 보다 유연한 입장을 가지고 있음도 밝힐 것이다. 특히 8장에서는 성혼학파의 리발에 대한 입장을 ‘소발’의 차원에서 살펴볼 작정이다. 9장에서는 현대학자들이 리발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으며, 이를 실발, 허발, 소발로 분류한다. 10장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이 책에서 해결하지 못한 남겨진 문제들을 다룰 예정이다.
2년 전 오늘,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구급차에 실러 간 후, 인공호흡기에 의존한 채 35일 동안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많은 분들의 기도와 응원 덕분에 살아 돌아 올 수 있었다. 모든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죽어가던 생명을 구해준 구암동 119대원과 충남대학교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 의료진의 헌신적 치료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안절부절 했을 나의 가족과 형제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나의 은사 태암 황의동 선생님의 학은에 감사드린다. 이 책이 선생님의 가르침에 누가 될까 두렵기만 하다. 또한 대구교육대학교 장윤수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생면부지인 나를 학부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게 했고 연구실까지 내어 주었다. 그때 이황의 사칠논변을 대학원생들과 함께 찬찬히 다시 읽을 수 있었다. 대학원 강의를 통해 오래 전에 쓴 글을 수정 ·보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끝으로 어려운 출판 환경 속에서 학술서적을 기꺼이 출판해 준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의 원장 및 편집부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책의 내용에 대하여 강호제현들의 아낌없는 질정을 바란다.
이 책을 고인이 되신 아버지 김종호 선생과 어머니 이금연 여사의 영전에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