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김욱진은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지상의 존재자를 향한 지극한 긍정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그는 불가피한 소멸의 형식을 넘어 항구적 존재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려는 순간적 전환을 희원한다. 사실 모든 존재자는 소멸 직전에만 자신의 순수한 외관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사물의 영원성이란 불가능한 것이고 오히려 모든 사물은 사라짐으로써만 자신이 부여받은 시간을 충실히 살아낼 수 있을 뿐이다. 김욱진의 시에 드러나는 사물은 이러한 시간의 운명에 대한 응시에 의해 선택되고 배열되는 특성을 가진다. 시인은 삶의 숱한 고통을 생성하는 바닥에서 시작하여 정신의 극점을 이루는 모습을 향해 나아간다. 이렇게 시간이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순간을 그려내는 김욱진의 미학은, 비록 그것이 소멸의 필연성을 견지한다고 하더라도, 지극한 긍정에 감싸인 존재자들의 상황을 기록해 가는 역설적 속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소멸해 가는 사물의 형식을 통해 유한한 삶에 웅크린 불모와 폐허의 기억을 꺼내 올리는 시인의 원형적 기억은 좀 더 심화된 형상으로 그의 시 안에서 펼쳐지게 된다.
아, 어디쯤일까
길을 걷다 폐휴지 한 리어카 싣고
언덕길 오르는 맨발을 보았다, 나는
들었다, 발이 하는 말을
발가락은 바짝 오므리고 뒤꿈치는 쳐들고
그래도 뒤로 밀려 내려가거든
헛발질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혓바닥 죽 빼물고 땅바닥 내려다봐
써레질하는 소처럼
발바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바닥과 바닥은 통하는 법이야
그래, 맞아
둘이 하나 된 바닥은 바닥 아닌 바닥이지
손바닥처럼 그냥 가닿는 대로
가닿은 그곳이 바닥이니까
여기, 지금, 나는
바닥 아닌 바닥에서
보이지 않는 발
바닥을 보았고
바닥 없는 바닥
아슬아슬 가닿은 발
바닥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소리 들었다
비 오듯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사이로
리어카 바퀴가 미끄러져 내려갈 적마다
발바닥은 시험에 들었다
땀 한 방울 닿았을 뿐인데
그 바닥은 난생처음 가닿은 바닥
발가락과 발뒤꿈치는 땀방울 밀고 당기며
발바닥이 바닥에 닿았다고
어느 바닥인지 알 수 없는 그 바닥
간신히 가닿고 보니
바닥이라는 바닥 기운 다 끌어당기고 가는 저 발
바닥은 바다보다 깊고 넓적하다
- 「발이 하는 말」 전문
여기서도 ‘말’에 대한 자의식은 충실한 확장성을 가지고 나타난다. 시의 전경(前景)은 우연히 길을 걷다가 바라보게 된 “폐휴지 한 리어카 싣고/언덕길 오르는 맨발”에서 시작된다. 그때 시인은 “발이 하는 말”을 들었노라고 고백한다. 오므린 발가락과 쳐든 뒤꿈치가 노동의 자세를 사실적으로 말해주지만, 시인은 어느새 써레질하는 소처럼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발바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때 “바닥과 바닥은 통하는 법”이라는 원리에 도달하고 마침내 시인은 “둘이 하나 된 바닥은 바닥 아닌 바닥”이라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손바닥처럼 그냥 가닿는 대로/가닿은 그곳이 바닥”이고 “바닥 아닌 바닥에서/보이지 않는 발/바닥을” 바라본 것이다. 시인은 주체, 시간, 공간을 하나로 만드는 “바닥 없는 바닥”에서 “아슬아슬 가닿은 발/바닥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소리”를 듣고 있다. 시인이 바라보고 난생처음 가닿은 ‘바닥’, “어느 바닥인지 알 수 없는 그 바닥”에 힘겹게 다다르고 보니 “바닥이라는 바닥 기운 다 끌어당기고 가는 저 발/바닥”이야말로 바다보다 깊고 넓지 않았던가. 그러한 진실이 바로 ‘발이 하는 말’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때 ‘바닥’은 바닥(bottom)이자 바닥(basis)일 것인데, 시인으로서는 손바닥과 발바닥이 닿는 바닥에서 자신의 언어를 쌓고 그때 가장 밑바탕이 되는 언어를 들은 것이다. 쉽사리 상투적 연민으로 나아갈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도 언어적 자의식이 밀어붙이는 인식론에 가닿는 시인의 의지와 경륜이 든든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그 ‘바닥’은 시인으로 하여금 “새로 거듭나는 순간, 알맹이”(「알맹 상점」)를 경험하게끔 해주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나 혼자 걷다 보면/그 땅은 온전히 나의 땅이 되고”(「나는 땅 부자다」) 마는 역리(逆理)를 알게끔 해주고 있는 것이다.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