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의 회화적 가치
순수 미술로서의 가능성
그동안 민화 연구는 작가를 배제한 채 화조도, 산수도, 문자도, 책거리 등의 유형적 분류나 혼례, 제례, 액막이 등의 용도별 접근 방식에 국한되었다. 또한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와 같은 상징과 의미 해석에 집중하면서, 민화의 조형성과 회화적 가치에 대한 미학적 접근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오늘날까지 민화를 다룬 대부분의 연구와 서적은 도상학적 해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민화를 단순한 민속적 산물이 아닌 독창적인 조형 세계를 담은 회화 작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제작 연대나 작가명을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예술성과 작가 정신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익명의 화가들이 펼쳐 보인 조형성과 표현 방식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판타지아 조선민화』는 민화를 순수 회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조형적 아름다움을 품은 작품만을 선별해 엮은 새로운 형식의 민화집이다. 전 4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화조도, 산수도, 책거리·문자도, 호랑이·무신도라는 큰 테두리 안에 어해도, 구운몽도, 삼국지도 등 조금 더 세부적인 장르까지 아우르고 있어 민화를 사랑하는 모두의 심미적 만족도를 충족시킨다. 더욱이 민화를 직접 그리며 공부하는 민화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자료집이 되어줄 것이다.
민화의 조형성과 해학성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미술
민화를 서양미술의 시각으로 살펴보면 형식면에서 역원근법과 같은 원근법의 해체, 윤곽선과 평면성, 풍부한 색채와 색감, 규칙 없는 자유자재의 필치 등 대단히 독특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조선민화는 서양의 모더니즘 미술보다 더욱 빠르게, 더욱 파격적으로 형식을 해체하며 독창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해왔다.
민화의 조형적 특징 가운데 첫째로 손꼽는 것은 바로 ‘추상성’이다. 민화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온통 추상의 세계다. 꽃과 나비, 산과 바위, 풀과 나무 같은 소재들이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마치 방금 붓을 놓은 듯한 생생함과 활기를 전달한다. 또한, 이러한 요소들은 반(半)추상의 형태로 배치되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초현실적인 세계를 연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화의 추상성은 현대미술의 난해한 개념과 달리, 별다른 설명 없이도 친숙하고 편안한 감상을 유도한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실험이 아니라, 민화 특유의 해학성과 연결되면서 더욱 의미를 갖는다.
민화뿐만 아니라 판소리, 탈춤, 굿 등 한국의 전통 예술에는 독특한 해학성이 스며들어 있다. 해학이란 ‘익살스러우면서도 풍자적인 말이나 행동’을 의미하며, 민화 역시 이러한 해학적인 요소를 강하게 내포한다. 민화에는 한국인 특유의 유머와 위트,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녹아 있으며, 친숙하고 간결한 표현을 통해 진솔하면서도 건강한 미적 감각을 전달한다. 이는 민화를 그리는 기법이 아니라 한국인의 감성과 심성이 축적된 집단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한 조형성과 문화사적 가치를 지닌 민화는 앞으로 더욱 깊이 있는 연구와 조명이 필요한 중요 문화유산이며, 관람자에게 해방감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선사하는 예술 장르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K-문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지금, 민화는 일본, 미국, 프랑스 등 해외 유수의 박물관·미술관의 소장품에 이름을 올리며 그 탁월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여전히 민화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하지 않은 듯하지만, 이제 우리도 한국만의 독창적인 예술인 민화를 재평가하고, 이를 세계미술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연구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민화의 가치는 단순히 한국 정통미술사의 틀 안에서만 논의될 것이 아니라, 조형적 측면과 미의식을 중심으로 보다 폭넓게 탐색되어야 한다. 회화적 완성도와 독창성을 기준으로 엄선한 작품으로 구성한 『판타지아 조선민화』가 민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싶은 독자, 한국 전통 예술의 깊이를 느끼고 싶은 예술 애호가들에게 소중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