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지는 못합니다.
저는 오로지 걷지요.
그것도 아주 느리게, 느리게.”
-본문 중에서
70만 독자가 사랑한 작가 강세형, 5년 만의 신작 에세이
걷고 생각하고 적어 낸, 작고 반짝이는 일상의 기록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나의 제자리는 어디일까.”
현관문을 여는 날보다 안 여는 날이 더 많은 사람.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밥 먹고 집에서 식물을 돌보는, 자신에게 최적화된 공간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 반기는 이들과의 약속이지만 약속이 취소되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지인들로부터 ‘히키코모리’라 놀림 받는 사람. 여행을 좋아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역시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 ‘공감의 작가’라 불리며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희한한 위로》 등의 에세이를 통해 70만 독자의 큰 사랑을 받은 작가 강세형이 조금 특별한 글을 모아 냈다.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해 걷는 걸까. 생각을 멈추기 위해 걷는 걸까.’ 갸웃하며, 1년간 매일 꼬박 걷고 기록한 반짝이는 일상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책 제목처럼 ‘현관문을 매일 여는 사람이 되었다’.
걷는 동안 수많은 단어들이 나에게 와 말을 걸어, 못 이기는 척 한글창을 열고 받아 적기 시작했지만, 그 기록들 또한 하루하루의 기록일 뿐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어떤 날엔 그저 친구들의 무해한 농담을 떠올리며 걸었다. 어떤 날엔 ‘세상은 거대한 놀이터인데, 어른이 되어 가면서 모두 그걸 잊어버리지’라는 영화 속 대사를 떠올리며 걸었고, 또 어떤 날엔 ‘이 짓이라도 안 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라는 노 소설가의 글을 떠올리며 걸었다. 어떤 드라마에서 생각이라는 걸 해야 할 때마다 하염없이 걷는 여자를 떠올리며,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해 걷는지, 생각을 멈추기 위해 걷는지 궁금해하기도 했고, 꽤 많은 날엔 아버지를 생각하며 걸었다. -본문 중에서
강세형 작가는 대단한 변화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10여 년 전, 자가면역질환 베체트의 발병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통증이 시작되었고, 통증은 바깥세상의 소요를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통증을 다스리며 침잠해 있던 시간이 지나고, 이제 조금씩 운동을 시작해 봐도 좋겠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새기며, 펜데믹 이후 일상으로 복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운동 부족이라는 글자가 가득한 건강 검진 결과지를 펼치며, 자꾸만 현관문을 향하는 자신의 시선을 느끼며, ‘산책’이라는 단어가 귀에 와 닿기 시작했다. 작가는 말한다. “내 삶의 어떤 특정한 시기에 그 모든 사소한 일들이, 우연과 같이 동시에 나를 찾아왔을 뿐이다.”
어떤 날엔 공원에서 만나는 검은 얼룩 고양이의 안부가 궁금해 현관문을 열었고, 또 어떤 날엔 붕어빵 아주머니의 오늘이 궁금해 현관문을 열었다. 계절이 바뀌며 변해 가는 공원의 색이 궁금해서, 해가 짧아지면서 달라지는 가로등 켜지는 시간이 궁금해서 산책을 나섰다. 대단한 계기, 결연한 의지 같은 건 없었지만, 매일 현관문을 열고 바깥을 걸으며 그의 내면은 쨍한 파란 밤하늘처럼 깊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항상 집에만 있다 세상 밖으로 나오니, 슬픈 표정, 아픈 표정, 지친 표정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자꾸만 놀란다. 그리하여 어쩐지 자꾸만 건투를 빌게 된다. 한편으론 그 건투가 그냥, 나의 오지랖이길 바라며. -본문 중에서
“일상의 순간순간들이 모여 행복이 쌓여 간다.
모두가 그렇게 열심히 행복을 수집해 간다.”
산책하며 수집한 평온의 풍경들, 생의 아름다움
현관문을 열고 길을 나선 그는 발견한다.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가는 ‘낮의’ 할머니들과, 어디서 구한지 모르겠는 형광 조끼를 입고 폐지를 모으는 ‘밤의’ 할머니들을, 스치듯 지나는 무례한 사람의 행동과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의 몸짓을, 길 한가운데 서서 울며 다투며 그럼에도 사랑을 하는 이들을, 소멸하는 꽃잎들과 있는지도 몰랐던 강가의 왜가리들과 매일 안부를 묻게 되는 고양이들을. 그리고 생각한다. 뱉어내 버린 미성숙한 말들을, 친구들의 다정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조언들을, 어느 한 시절을 버티게 해 준 낯선 사람들과 그들이 내민 손길을, 떠난 이들과 그리고 정말로 떠나 버린 아버지를.
그 어떤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는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조금 더 어렸을 땐 지루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이 고요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요즘의 나는 그렇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고맙다. 어제와 같은 오늘의 내가 기특하다 느껴질 때도 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을 나는 인간사에 적용하고 싶지 않다. 비 따위 안 맞을 수 있다면 안 맞는 게 좋은 삶이다. 고생 끝에 낙 같은 소리도 믿지 않는다. 몸고생이든, 마음고생이든, 피할 수 있는 하루가 좋은 하루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를 보낸다. 특별히 좋은 일도 특별한 다짐 따위도 없었지만, 특별한 고생도 없었던 하루가,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저물어 가고 있다. -본문 중에서
스스로 ‘싫증을 잘 내고, 포기가 빠르고, 모든 것을 편식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강세형 작가는 산책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제는 ‘히키코모리 프로산책러’라는 놀림을 받으며, 매일 현관문을 연다. 그는 자신보다 천천히 걷는 이를 발견하면 그의 건강을 염려하고, 임시휴업 안내가 붙은 가게를 보면 가게의 존폐를 걱정하고, 주먹보다 작은 참새를 보며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을 떠올린다. 노점 할머니에게 2천 원어치 풋고추를 사며 아무 일 없이 보낸 하루에 감사하며, 평온한 행복을 수집한다. 소소한 뿌듯함, 작은 기쁨, 하찮은 즐거움들을 수집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복한다. 강세형 작가는 말한다. 걷고, 생각하고, 기록한 자신의 소소한 일상이 누군가에게 작은 응원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고. 자신이 ‘닫힌 현관문’을 열었듯,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자기 앞을 막고 선 ‘닫힌 무언가’를 열어 보기를 바란다고. 봄을 걸으며 소멸을 생각하고, 겨울을 걸으며 시작의 설렘을 느끼는 그의 글은,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 마음속에 숨겨 둔 감정들을 태우게 하는 작은 불씨가 되어 줄 것이다.
요즘 나는 매일 현관문을 연다.
마음도, 머리도, 조금씩 딱딱해져 가는 내가 지루하다 느껴진 걸까. 무엇을 보고 웃게 될지, 무엇을 보고 또 아파할지, 내 안의 어린아이를 찾아 현관문을 연다. 놓치면 또 지나가 버릴 오늘의 밤하늘을 기억하기 위해, 깜빡 눈을 감았다 뜨면 또 사라져 버릴 오늘 하루를 기억하기 위해, 한글창을 열고 기록을 남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