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계보를 현대의 철학자 중심으로 정리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철학적 사유를 고민하는 독자에게 유용한 책입니다.
〈머리말〉
공공철학은 좋은 삶(또는 좋은 사회)을 둘러싼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간의 철학적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핵심 가치로 삼고 이를 국가로부터 또는 국가(법과 제도)를 통해 지키고자 한다. 반면, 공동체주의자들은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고 수렴하는 자기통치의 원리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런 철학적 논쟁이 본격화된 것은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할 때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 소득불균형, 사회적 관계의 파편화, 공동체의 붕괴, 자기중심적 개인의 양산, 자아정체성의 위기, 도덕적 무질서 등의 사회·경제·심리적 현상들은 자유주의가 토대로 삼는 개인주의와 소극적 자유(외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시장 영역에서 통용되는 가치인 ‘화폐’와 ‘경쟁’의 논리가 일상적인 삶의 조건과 방식을 규정짓는 사회적 문법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현실은 그 심각성을 말해 준다. 개인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성과 주체로 전락해 스스로가 성과를 강요하고 착취한다.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관리·경영을 통해 능력을 배양하고 성과를 극대화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사회적 성공은 오로지 부(富)의 축적이라는 경제적 지표를 통해 확인되는 현실에서 타인과의 공존과 협력은 관심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타인은 자신의 욕망의 실현을 위한 한낱 도구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개인은 타인과의 결속과 연대의 안전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부과된 책임과 의무를 스스로 떠맡아야 하는 외롭고 불안한 주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단면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포도주를 증류하고 남은 순수한 알코올에 비유한 적이 있다. 포도주가 포도주로서 고유의 맛을 내려면 포도주에 포함된 ‘향취,’ ‘향미,’ ‘산미’ 등의 다양한 요소가 결합해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이 사라지고 순수한 알코올만 남은 포도주는 더 이상 포도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정, 사랑, 연대, 협력 등의 공동체적 가치가 사라지고 화폐, 경쟁, 효율성 등의 자본주의적 가치만 남아 있는 공동체(또는 사회)는 공동체로서의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형식뿐인 ‘텅 빈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대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내재한 한계와 결함을 드러내고 이를 보완하거나 극복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자유주의가 시장자유주의로 퇴색돼 가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공동체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개인의 자율성이 공동체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포기되는 전통적 공동체주의의 접근법과는 다른 것이다. 현대 공동체주의의 특징은 공동체적 가치를 위해 개인의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차이와 개성이 존중되는 다원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자율성은 거역할 수 없는 가치로 인정된다. 따라서 개인의 자율성이 존중되는 가운데 공동체적 연대와 협력이 가능한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런 공동체는 타인을 나와 동등한 자기의식을 가진 자율적인 인격체로 인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2025년 3월
용현 서재에서
문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