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는 말을 대신하는 가장 실천적인 전언
Penser à l’obscurité(어둠을 사유하라)
철학자 서용순은 절망과 갈등이라는 현실적 ‘어둠’을 예술과 철학에 대한 끈덕진 사유를 통해 실천의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불의와 자본의 횡포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선 ‘어둠’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고, 바로 그 사유의 치밀함 속에서 실천의 가능성이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철학과 시(예술)는 ‘지금, 여기’의 위태로운 지위에도 불구하고 ‘어둠’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그것을 드러낼 ‘새로운 언어’의 원천으로서 시대의 요청을 받아야 할 위치에 놓인다. 철학과 예술을 포함한 무용한 것들의 가치는 당대 사람들에게 무모하고 불온한 것으로 평가되겠지만, 현실을 극복할 가능성 역시 그러한 비가시적인 영역, 즉 ‘어둠’ 속에 잠재되어 있다.
12.3 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혼란과 갈등이 극에 달한 대한민국의 상황은 철학과 예술이 ‘실천’과 ‘참여’에 비해 무기력한 것으로 비치게 한다. 그러나 현실의 갈등과 불가능한 욕망이 커질수록 철학과 예술이 붙드는 ‘어둠’에 대한 사유는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웃거름의 역할을 한층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다. ‘세대’와 ‘성차’를 비롯한 갈등 문제와 ‘사랑’, ‘자유’, ‘시’, ‘민주주의’ 등 14장으로 이루어진 짧고 강렬한 서용순의 글은, ‘지금, 여기’의 문제가 지역과 문화를 초월한 인류의 보편적인 논쟁거리로서 긴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한다. 우리가 낡은 책장을 누벼야 하는 이유는 그곳에 해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상 밖의 궤적을 그리며 나아간 인류의 용기를 경험하기 위해서이다. 당신의 일상에서 한발 물러날 작고 강한 용기, 결과를 속단하고 포기하지 않을 용기만 있다면 현실의 혼란과 절망, 분노와 슬픔까지도 사유를 위한 동력이 되어 기필코 우리의 삶을 움직일 것이다. 이 책의 중간표지 하단에는 모두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Penser à l’obscurité(어둠을 사유하라). 어쩌면 이것은 ‘희망’이라는 말을 대신하는 가장 실천적인 전언이자, 도래하지 않은 ‘용기’의 마중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