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론
평설
강덕순 시인의 두 번째 시조집
출간을 축하하며
박 덕 은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강덕순 시인은 1952년 10월 6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2018년 6월 월간지 《문학공간》 시 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이어 《문학공간》 시조 부문 신인문학상, 《문학공간》 디카시 문학 대상을 받아, 문단에 데뷔하였다.
문학상으로는 제19회 혜산 박두진 전국 백일장,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센터 백일장 최우수상, 제9회 샘터문학 특별작품상, 고마노 문학상, 전주시조 백일장, 제52회 한민족통일 문화제전, 샘문 신춘문예 최우수상, 오은문학 시조 대상, 타고르 문학상, 무등산문학백일장 우수상, 전국 여성문학대전 시조 대상, 치유문학상, 완전공감 단시조문학상, 빛창 문학상, 삼행시 문학상 금상 등을 수상했다.
문단에서는, 광주문인협회 이사, 광주시인협회 이사, 한실문예창작 회원, 꽃스런 문학회 회장, 샘문그룹 자문위원, 오은문학회 부회장, 한국문인그룹 회원,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광주지역위원회 이사, 서은문학회 회원, 한국시인연대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그리움의 시간』, 시조집 『시심의 강에 하얀 돛배 띄우고』, 디카시집 『혼자 가야 할 길』 등이 있다.
자, 지금부터 강덕순 시인의 시조 세계를 오솔길 거닐 듯 탐구해 보기로 하자.
공중의 시린 품에 숨기는 하얀 심장
그리운 걸음걸이 남긴다 소복소복
당신과 함께한 날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날의 안간힘이 두 손을 움켜쥐고
우듬지 이어지는 흰빛을 높이 올려
다정한 당신의 사랑 속삭이며 비빈다
눈보라 휘날려도 발자국 포개지고
저 멀리 하늘 위로 동백꽃 펼쳐놓고
수많은 맹목의 설렘 달려가는 그 시절.
- 「순백의 꿈」 전문
이 시조에서의 시적 화자는 당신과 함께한 그 시절을 떠올린다. 인생에서 연인과의 사랑했던 순간만큼 아름다운 시절이 또 있을까. 그와 함께한 모든 첫자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기에 그리움만으로도 꽃은 피어났다. 공중을 서성이는 구름도 당신 집 앞으로 달려가 머뭇거리고 정오의 햇살도 당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당신의 발뒤꿈치를 따라다녔다. 그 시절의 다짐은 모두 당신의 심장에 바치는 그리움이었다. 어스름이 덮치고 간 저녁의 자리는 당신을 향한 세레나데로 가득찼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눈보라 휘날리고, 동백꽃 피어 있는 그 길 걷던 시절, 품에 숨긴 하얀 심장, 그리운 걸음걸이, 우듬지의 흰빛, 포개지는 발자국, 맹목의 설렘, 그리고 다정한 사랑의 속삭임 등이 당신과 함께한 날들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있다. “그날의 안간힘이 두 손을 움켜쥐고/ 우듬지 이어지는 흰빛을 높이 올려”와 “눈보라 휘날려도 발자국 포개지고/ 저 멀리 하늘 위로 동백꽃 펼쳐놓고”를 통해서 어떤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낸 성숙이 느껴진다. 추억 속에 잠긴 시적 화자가 잠시 행복감에 젖어 있다. 한편으로 그리운 당신에 대한 추억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감성의 아름다운 세계가 시적 형상화 되어 있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물결체 문장으로 후학들 키워내는
만귀정 푸르른 꿈 윤슬로 반짝이고
금당산 억겁의 인연 운명 걸고 푸르다
펼쳐진 황금들판 한 채의 저 가을집
노을빛 눈부시게 서창들 풍년 노래
용두동 지석묘에서 천년 고요 만난다
눈을 뜬 새벽들이 체온을 높이면서
오가며 마주하는 너스레 흘러넘쳐
인정이 넘실대는 곳 양동시장 골목길
새기고 다듬어서 간절히 기도하는
흰빛의 저 자세는 몸 낮춘 깨달음들
운천사 신비의 석불 서민들을 살핀다
수면을 빗질하며 물꽃 핀 풍암호수
결 고운 마음들이 하나둘 찾아들어
만개한 벚꽃 구경에 상춘객들 흥겹다.
- 「서구 팔경」 전문
강덕순 시인은 광주광역시 서구 팔경에 대한 스케치를 해놓고 있다. 서구 유적지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곳의 햇살과 그늘은 몇 생의 열림과 닫힘이 스며 있어 깊이가 남다르다. 어머니의 그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인연의 한끝을 잡고 걸어온 걸음걸음이 들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적지는 모든 인연의 해거름녘이며 다가올 인연의 새벽녘이다. 아직 피어나지 못한 꿈이며 이미 피어난 열정이다. 그곳에 가면 우리를 안아줄 누군가가 초록으로 별빛으로 함박눈으로 반길 것만 같다. 후학을 키워내는 만귀정, 억겁의 인연 두르고 있는 금당산, 황금들판 노을빛 눈부신 서창들녘, 천년 고요 서려 있는 용두동 지석묘, 인정 넘실대는 양동시장 골목길, 흰빛의 몸 낮춘 깨달음인 운천사 신비의 석불, 물꽃 핀 풍암호수, 결 고운 마음들이 찾아드는 벚꽃길 등이 이미지로 소개되고 있다. “물결체 문장으로 후학들 키워내는/ 만귀정 푸르른 꿈 윤슬로 반짝이고”를 통해 공간적 배경과 선비정신이 잘 그려져 있다. “눈을 뜬 새벽들이 체온을 높이면서/ 오가며 마주하는 너스레”가 양동시장의 활기찬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멋지다. 관찰자의 흥겨운 시선과 시적 형상화의 만남이 독자의 눈길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
기울어 넘어질 듯 보기도 불안 불안
찬바람 불어와도 그리움 스멀 스멀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듯 시리다
흙담벽 돌아보니 그 시절 살아온 집
그때가 그립구나 옛적에 꽃피우고
멍멍이 짖어대던 곳 꿈에서도 떠올라
사립문 소리 없이 여닫던 그림자들
눈앞에 아른아른 울타리 넘던 친구
안부를 묻고 싶은데 지금은 어디에
휘영청 달 밝은 밤 흘러간 그 시절만
하얗게 타오른다 허전한 이내 마음
도무지 달랠 길 없다 우정의 꽃 그리워.
- 「고향집」 전문
치유문학상 수상작인 이 시조에서의 시적 화자는 고향집을 여러 각도로 바라보고 있다. 고향집은 지친 내 마음을 누일 침상이다. 그 침상에 마음을 눕히면 양볼에 보조개가 패인 유년이 깔깔깔 웃으며 달려온다. 수줍은 듯 보조개꽃 피운 고향과 또래 아이들이 사립문 열고 들어온다. 멱감는 냇가에서 호미를 씻은 어머니가 노을을 주섬주섬 널며 해 질 녘을 연다. 멀리서 소고삐를 몰아쥐고 땡그랑 땡그랑 마을로 들어서는 늦은 오후가 들린다. 그 인기척에 고샅까지 달려온 개 짖는 소리가 노을을 더 붉게 물들인다. 무심한 세월이 그 고향집을 챙기지 못한 것인지 기울어 넘어질 듯한 초가집, 찬바람만 불어도 그리움이 스멀스멀 스며드는 집,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추억들, 흙담벽, 짖어대는 멍멍이, 사립문과 소리 없이 여닫던 그림자들, 울타리 넘던 친구들, 휘영청 달 밝은 밤의 그 시절, 우정의 꽃 등이 하얗게 타오르는 허전한 마음속에 앉아 있다. “흙담벽 돌아보니 그 시절 살아온 집/ 그때가 그립구나 옛적에 꽃피우고”에서 어떤 쓸쓸함과 아쉬움이 느껴진다. 흙담벽 안은 화자의 유년이 눈뜨고 잠들었던 곳이다. 그 담벽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화자는 또래 아이들과 함께 꿈을 키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휘영청 달 밝은 밤 흘러간 그 시절만/ 하얗게 타오른다 허전한 이내 마음” 여기서도 유년의 한 시절과 또래 아이들과의 추억이 진하게 다가온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의 이미지가 그 추억을 더 깊게 다가오게 만든다. 도무지 달랠 길 없는 마음, 추억 속에 잠겨 그리워하고 있다. 시적 형상화가 자연스럽고, 회상의 품속이 포근하다.
시간이 삭아지며 낮과 밤 머문 말씀
하루만 안 들어도 밥상을 못 차린다
단맛과 짠맛과 신맛 가지가지 다 있다
얼마나 신성한지 달과 별 찾아와서
두 손을 모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며
산짐승 침범 못하게 위풍당당 지킨다
구수히 건넨 안부 날마다 다정하고
먹어도 또 먹어도 평생을 지켜내며
혀끝을 환하게 하는 손맛 좋은 요리사.
- 「장독대」 전문
시적 화자는 시골 장독대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양지쪽에 자리한 장독대는 햇살이 해종일 반짝이는 몸을 궁글리며 뒹굴다 간다. 심심한 구름도 뭉게뭉게 항아리 속을 서성거리다 간다. 어스름이 지고 달이 뜨면 둥근 얼굴을 한 은달빛이 적막한 장독대를 어루만진다. 그렇게 장독대는 활짝 핀다. 그래서일까, 장독대에서 익어가는 장맛은 좋았다. 요즘처럼 마트에서 파는 장맛과는 차원이 달랐다. 풀벌레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 장독대여서인지 바람의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놓은 장맛은 짭조름하니 깊었다. 장독대를 오가는 발걸음이 잦아들수록 우리의 혀끝과 내일은 환해졌다. 시간이 삭아지며 낮과 밤이 머물던 곳, 밥상을 차리게 하던 원천, 단맛 짠맛 신맛이 공존하던 곳, 달과 별이 찾아오던 신성한 곳,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던 곳, 산짐승 침범 못하게 위풍당당히 지키던 곳, 구수히 건넨 안부 날마다 다정하던 곳, 혀끝 환하게 하는 손맛 좋은 요리사가 함께하던 곳 등의 표현이 독자의 추억을 향긋이 소환하고 있다. 그 장독대의 수많은 항아리들, 시간이 흘러들어 찰랑거리고 달의 궤도를 뒤따라간 달빛이 잠시 쉬었다 가던 곳. 가끔은 숨바꼭질하던 유년이 몸을 숨기던 곳이었다. 쉬운 듯 감칠맛 나게, 우아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끌어 가는 시적 형상화 솜씨가 좋다.
모든 것 새것으로 바꾸고 싶은 걸까
긴긴밤 밝은 미소 밤새워 기원 담아
액운은 멀리 보내고 성스런 운 맞는다
붉은빛 하나되어 형제들 모두 뭉쳐
둥글게 살아가라 새알심 빚어내어
마을길 돌고 돌아서 만사형통 바란다
백발에 간구 소리 골목의 골골마다
새벽녘 갈 길 밝혀 정한수 한 사발에
온 가족 소원 기도를 두 손 모아 바친다.
- 「동짓날」 전문
시적 화자는 향수에 젖게 하는 동짓날의 추억 한 송이를 꽃피워 놓고 있다. 동지는 1년 가운데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동지를 기준으로 한 해의 양기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옛날에는 동지를 ‘양의 기운이 다시 올라오는 날’이라고 간주했다. 농경사회에서는 그만큼 동지를 중요한 기념일로 인식했기에 여러 의식과 전통이 있었다. 특히, 가족의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며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대표적인 풍습이 동지팥죽을 먹는 것이다. 팥의 붉은색이 악귀를 물리친다고 믿어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동지팥죽을 먹었다. 부적과도 같은 보름달 새알심을 동글동글 빚어 솥에 넣으면 팥물을 빨아들여 둥싯 떠올랐다. 잘 익은 달빛이 그릇마다 흘러들어 우리는 동지팥죽을 먹으며 살이 오르고 풍요를 기원했다. 그렇게 동지팥죽을 먹으면 몸 안에 달이 떠올라 어둠과 상처 많은 길로 들어설 때도 쉽게 넘어지지 않았다. 긴긴밤 밤새워 기원 담아 성스런 운 맞이하던 날, 붉은빛 하나 되어 형제들 마음 뭉치게 하던 날, 둥글게 살아가라고 새알심 빚던 날, 마을길 돌고 돌아 만사형통 빌던 날, 백발의 간구 소리가 골목 골골마다 들리던 날, 온 가족 소원 기도를 간절히 바치던 날의 정경이 선명히 그려져 있다. 추억 속으로 들어가, 향수를 빚어내는 이미지 구현 솜씨가 남다르다.
애타게 보고파도 만날 길 없다 한다
이번엔 네가 오면 다음엔 내가 없다
너와 나 만날 길 위해 행복처럼 꿈꾸자
나는 꽃 너는 뿌리 난 줄기 너는 꽃잎
초조한 너의 모습 애간장 타는구나
가을빛 즐기던 인연 흔적 없는 그 모습
찾을 길 없는 건가 보고픈 너의 얼굴
간절한 만남 끝에 따스한 너의 손길
우리의 희망인 것을 그 누구를 탓하랴.
- 「상사화·1」 전문
이 시조에서의 시적 화자는 상사화의 처지를 의인화하여 표출하고 있다. 상사화(相思花)는 꽃이 필 때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 꽃이 피지 않는다. 잎은 봄철에 나오는데 6~7월에 지고, 꽃은 8월에 핀다.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만나지 못하기에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그리움이 절정에 다다르는 꽃대궁이 아무리 뜨거워도 잎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혼례를 앞둔 신부가 설렘으로 들떠 있어도 신랑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벌써 한 우주가 열렸다가 닫힌 이후이다. 속눈썹 젖게 울음 울어 깊은 슬픔에 갇히고 만다. 어떤 인연은 꽃처럼 향기를 좇아 서로의 아름다운 숙명이 된다는데 상사화라는 인연의 꽃은 그 숙명도 비운에 해당한다. 활짝 핀 슬픔만이 8월을 가득 메우고 있어 가슴이 먹먹하다. 애타게 보고 싶어도 만날 길 없는 운명, 하나가 오면 다른 하나가 없으니, 서로의 만남을 위해 눈물처럼 행복처럼 꿈꿀 수밖에 없다. 꽃과 뿌리, 줄기와 꽃잎, 늘 초조한 모습, 늘 애간장 타는 세월, 가을빛 즐기던 인연, 그마저 흔적 없는 나날, 보고 싶지만, 찾을 길 없고, 따스한 손길 기다리지만 허무뿐, 간절한 만남을 기원하는 희망, 그것마저 가질 수 없으니, 그 누구를 탓하겠는가. 설령 숙명일지라도, 이를 뚫고 나아갈 길이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감성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눈물짓게 하고 있다.
언제나 누구든지 원하는 시간대에
마음만 먹는다면 날마다 갈 수 있다
해종일 누비고 다녀 가슴 활짝 웃는다
지루한 일상생활 한 번쯤 일탈할 때
원하는 서민에게 공짜로 산행 산책
무조건 베풀어 주니 엄마의 품 같은 산
그렇게 오는 대로 저렇게 가는 대로
차별을 두지 않고 계절이 흐르는 듯
우리의 수호신으로 산등성이 지킨다.
- 「무등산·1」 전문
시적 화자는 무등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산을 찾는 이유는 산의 말을 듣기 위해서다. 초록의 몸으로 눈뜨며 일어나 바람소리에 귀기울이며 자란 산의 속엣말을 듣고 싶어 산을 찾는 것이다. 큰바위처럼 몸가짐을 단정히 한 산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겸손해진다. 억겁의 세월을 견딘 나무와 바위를 마주하며 시끄러운 우리의 속내를 내려놓게 된다.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킨 계곡의 물소리들이 건네는 위로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계곡을 오르는 민달팽이의 걸음에 불현듯 겸손해진다. 온몸으로 밀어 올리는 민달팽이의 걸음을 배우며 자신을 낮추게 된다. 언제나 원하면 품어 주는 산, 마음만 먹는다면 날마다 다가갈 수 있는 산, 지루한 일상에서 일탈하게 해주는 산, 서민에게 공짜로 산행을 제공해 주는 산, 무조건 베풀어 주는 산,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이해해 주는 산, 차별을 두고 않고 포옹해 주는 산, 수호신 되어 산등성이를 지켜 주는 산. 무등산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관심을 보내주고 있다. 전폭적인 사랑을 바치고 있는 듯하다. 마치 고향처럼, 부모처럼, 이상향처럼, 궁극적 삶의 목표처럼, 여생에서 품고 싶은 인품처럼 대하고 있는 무등산, 그 산을 매일 바라보고 살아가는 서민들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달 밝은 보름달이 한밤중 출렁 출렁
금물결 도란도란 맑은 꿈 깨워 주니
섞여서 부딪히는 잎 부벼대는 속삭임
비바람 몰아쳐도 절개로 지켜낸다
스치어 빠져드는 옥피리 소리 높여
언제나 뒤돌아보며 감싸 안는 바람결
향기에 젖어 버린 내음새 들이킨다
영원한 우정으로 서로를 다독다독
하늘에 큰 목소리로 보고 싶다 외친다.
- 「대숲」 전문
시적 화자는 대숲의 향취를 조용히 그려내고 있다. 댓잎은 바람의 말씀을 온몸으로 사락사락 읽는다. 말씀을 읽기 위해 초록으로 잎을 짓고 있는 것일까. 사계절 내내 푸르다. 가만히 귀기울이면 댓잎 비벼대는 후드득 한 바가지의 말씀에 여름은 시원해지고 해질녘은 낭만으로 출렁거린다. 치밀하게 바람의 말씀을 적어 내려간 초록이 싱싱해 대숲에 들어서면 대나무의 마디마디를 만져보게 된다. 대나무의 칸칸마다 들어 있는 비움과 채움이 조화롭다. 달 밝은 보름밤에는 출렁이고, 금물결로 도란도란 맑은 꿈 깨워 주는 대숲, 서로 섞여 부딪히는 댓잎들의 속삭임이 정겨운 대숲, 비바람 속에서도 절개 지켜내는 대숲, 옥피리 소리 높여 연주하는 대숲, 언제나 뒤돌아보며 바람결 감싸 안아 주는 대숲, 향기에 젖어 버린 내음새 들이키는 대숲, 영원한 우정으로 서로를 다독이는 대숲, 어쩌다 하늘에 큰 목소리로 보고 싶다 외치는 대숲. “비바람 몰아쳐도 절개로 지켜낸다/ 스치어 빠져드는 옥피리 소리 높여”에서 절개와 옥피리 소리가 서로를 빛내주고 있다.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기 위해 대숲은 끊임없이 옥피리 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마치 아픔이 우리를 흔들어도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그 옥피리 소리를 불며 뚜벅뚜벅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표현 하나 하나가 정깊고, 따스하고, 싱그럽다. 섬세한 감성을 만나게 해주고, 그 감성의 향기를 맛볼 수 있게 해놓고 있다. 그래서 좋다.
첫새벽 눈 비비고 창밖에 소리 높여
늦잠을 깨우려고 향긋이 부른 노래
어쩌나 뒤척이면서 일어날 때 상쾌해
아침이 또 행복을 부른다 매일 매일
똑같은 시간대에 날마다 같은 일상
어깨 펴 산뜻한 마음 가슴 열어 좋은 날
저녁에 꽃문 닫고 달빛과 어우러져
아침의 고운 노래 귓가에 맴을 돌아
여름아 어서 가거라 저 오솔길 따라서.
- 「나팔꽃」 전문
시적 화자는 나팔꽃의 그림을 시어로 펼쳐놓고 있다. 나팔꽃은 해가 진 후 꽃망울이 열리기 시작하여, 다음 날 새벽에 꽃이 피어 오전에 시든다. 참으로 부지런한 꽃이다. 게으름은 1도 없는 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나팔을 부는 것일까. 인생의 늦잠은 절대 안 된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나팔꽃의 줄기는 다른 물체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면서 끝끝내 가장 놓은 곳으로 올라선다. 안간힘의 끝자락에서 꽃잎과 향을 밀어 올린다. 산다는 것은 오르막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어오르는 것이라며 꽃잎을 활짝 편다. 첫새벽에 창밖에서 늦잠 깨우려고 향긋이 부르는 노래 같은 꽃, 기상의 상쾌함을 북돋워 주는 꽃, 날마다 아침처럼 행복을 부르는 꽃, 똑같은 시간에 어깨 펴 산뜻한 가슴 열어 주는 꽃, 저녁엔 꽃문 닫고 달빛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꽃, 아침의 고운 노래 귓가에 맴돌게 하는 꽃, 오솔길 따라 여름을 내몰아 주는 꽃.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화자의 마음을 나팔꽃이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해 멋스럽다. 인생 마지막 날까지 나팔꽃처럼 오르고 또 오르며 살아가자고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나팔꽃을 바라보는 시선, 그 마음이 참 곱다. 이렇게 고운 감성과 시선으로 이 세상을 채운다면, 행복한 이상향이 자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조의 특질 속으로 곧바로 직진하는 시적 화자의 시선에 박수를 보낸다.
왔다 간 물결 위에 수많은 발자국들
새하얀 모래칠판 써 보는 사랑 노래
소금꽃 피워낸 바닥 추억들의 놀이터
지우고 또 써 봐도 덮치는 파도의 힘
밀려서 떠내려간 수많은 저 사연들
포말로 흘러들어도 못 찾는다 그 흔적
그리움 하늘 높이 두둥실 잡지 못해
하루가 밀물처럼 떠나는 저 수평선
지는 꿈 잡지 못하니 저녁노을 아쉬워.
- 「바다」 전문
시적 화자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떤 감성을 시적 형상화 해놓고 있다. 파도는 늘 철썩철썩거리지만 어제와 오늘의 바다는 똑같지 않다. 적극과 맹목의 자세로 밀려드는 밀물, 망설임과 주저의 자세로 밀려나는 썰물 그 사이 어디쯤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스며 있다. “왔다 간 물결 위에 수많은 발자국들/ 새하얀 모래칠판 써 보는 사랑 노래”가 있다. “소금꽃 피워낸 바닥 추억들의 놀이터”가 있다. 누군가는 억겁의 생을 돌아 사랑을 완성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온몸 던져 깨지는 파도처럼 이별을 했을 것이다. 달빛이 뚝뚝 흘러내리는 바닷가를 걸으며 적막의 날개깃을 접고 울었을 것이다. 한때는 희망의 백색 갈기, 그 파도 소리에 깔깔거렸을 텐데 이제는 울부짖음으로 포효하는 파도 소리에 슬픔을 기댔을 것이다. 왔다 간 물결, 그때 박힌 수많은 발자국들, 모래칠판에 쓰여진 사랑 노래, 소금꽃 가득한 추억의 놀이터, 지우고 또 써놓은 시심을 덮치는 파도, 밀려서 떠밀려 간 사연들, 포말로 흘러들어 못 찾는 흔적들, 하늘 높이 두둥실 떠올라 잡지 못하는 그리움, 수평선으로 밀물처럼 떠나는 하루, 잡지 못하는 꿈, 아쉬움에 젖어 바라보는 노을. 어느 구절이나 정겹지 아니한 게 없다. 끊임없이 추억을 소환하고, 끄집어내어 안아 주고 다듬어 주고 얼래고 보채고 눈물짓는 감성, 그 감성의 다채로움, 이 세계를 마음껏 맛보게 하는 게 시조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산기슭 푸른 하늘 골마다 새들 울고
계곡에 부는 바람 신바람 마실길에
순결한 앳된 모습에 수줍게도 피는 꽃
보라색 홑치마에 속적삼 풀어놓고
솔바람 시원하여 해맑게 짓는 미소
청솔모 달음박질에 숨죽이며 피는 꽃
산나리 어여쁜 옷 샛노란 모자 쓰고
옷고름 살랑살랑 하늘길 풀어놓고
길섶에 허리 흔들며 요염하게 피는 꽃.
- 「도라지꽃」 전문
시적 화자는 산기슭에 피어 있는 도라지꽃을 관찰하고 있다. 시조의 첫 시작은 수줍은 처녀 같은 도라지꽃을 그리다가 중반부에서는 매혹적인 여인으로 다가선 도라지꽃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 막 꽃잎을 여는 도라지꽃과 보라색 활짝 펼쳐 농익은 여인 같은 도라지꽃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유혹하고 싶은 본색을 감추지 않는 보라색은 도라지꽃의 농익은 마음이다. 무더운 불면의 밤을 견디며 만개한 유혹이 보라색이다. 환하게 피어난 요염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 설익은 망설임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고 명확한 색, 그 보라색을 활짝 열고 있다. 도라지꽃은 요염한 보라색에서 피어난다. 골짜기에 새들이 울고 바람 불고 있다. 신바람 난 마실길에 만나게 된 순결하고도 앳되고 수줍은 도라지꽃, 보라색 홑치마 입고, 속적삼 풀어놓고 서 있는 꽃, 솔바람 맞으며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꽃, 청솔모 달음박질에 숨죽이며 피어 있는 꽃, 어여쁜 옷, 샛노란 모자 쓴 채, 옷고름 살랑살랑 풀어놓고 허리 흔들며 길섶에 피어 있는 꽃. 묘사 하나 하나가 섬세한 감성 터지로 이어지고 있다. 다채로운 감성의 세계로 손잡고 이끄는 솜씨가 경이롭다. 행복한 시심의 안내를 받고 있는 것 같아 가슴 뿌듯하다.
시골의 자갈밭에 땅 일궈 살고 있다
호롱불 밝혀 주는 벌나비 즐겨찾기
날마다 쳐다보아도 싫지 않고 행복해
밤이슬 칠보단장 꾸며도 찾지 않고
분단장 꾸몄는데 눈길도 안 주더니
열매가 굵어지니까 보는 눈길 다르다
이제는 자랑할래 존재감 높일 거야
갈수록 매력덩이 모두 다 부러워해
늙어서 대우받는 건 나뿐인가 하노라.
- 「호박꽃」 전문
이 시조에서의 시적 화자는 호박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려놓고 있다. 호박꽃을 통해 일의 시작과 중간이 잘 풀리지 않고 꼬이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좋은 날이 온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밤이슬 칠보단장 꾸며도 찾지 않고/ 분단장 꾸몄는데 눈길도 안 주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맞다. 삶을 대하는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하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가꾸다 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 호박넝쿨은 땡볕을 두려워하지 않고 맹렬한 자세로 나아간다. 결코 어둠과 적막과 아픔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저 자세. 내일을 향해 내면의 힘을 밀어 올리며 앞으로 전진한다. 시골 자갈밭 일궈 호롱불 밝혀 주는 꽃, 쳐다보는 이들에게 행복 안겨 주는 꽃, 밤이슬 칠보단장 꾸며놓고 분단장까지 하고는 관심의 눈길 기다리는 꽃, 열매 굵어져 존재감 한층 높여 매력을 부각시키는 꽃, 늙어서 대접받는 여생 위해 최선을 다하는 꽃. 긍정적 시선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시적 화자가 왠지 친근해 보인다. 사물의 해석이 밝을수록, 긍정적일수록, 순수할수록, 인생은 더 행복한 것 같다. 그 메시지를 가슴에 안겨 주는 시라서 더욱 기분이 상큼하다.
시조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문학 장르이다. 고려 후기의 역사적 전환기를 맞은 신흥 사대부들이 유교적 관념과 주관적 정서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문학 양식을 찾는 과정에서 빚어진 문학 장르, 즉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 형태인데, 이는 지금 현대 시조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처음에는 사대부를 중심으로 창작, 향유되다가, 점차 기녀 등으로 작자층이 확대되었고, 후기에는 평민층까지 확대되었으며, 지금은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문학 장르가 되었다. 이 시조는 지금까지 유교적 이념, 충효 사상, 강호한정가, 연정, 사랑, 이별 등을 담은 노래, 교화, 개인의 일상 등을 다루는 문학 장르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고려 말에는 시조라는 형태가 정형시로 완성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평시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왕조 교체기의 위국충절, 패망한 나라에 대한 회고, 간신에 대한 풍자 등이 주요 내용을 차지했다.
조선 전기의 시조는 그 간결함이 유학자들의 검소함과 담백한 정서를 표현하는 데 적절했으며, 양반 사대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확고하게 자리를 구축했다. 이때 유학자들의 검소함과 담백한 정서, 충의 사상, 자연관 등을 주로 다루었다.
조선 후기의 시조는 우국충절, 현실에 대한 경세 등을 담았고, 산문 정신의 발달로 사설시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국충절, 현실에 대한 경세, 자연과 인정, 서민적인 진솔하고 소박한 생활 감정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다뤘는데, 이는 평민층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사설시조는 주로 평민들이 창작하였으나, 그 작가와 창작 연대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주로 당대 사회상, 세태 풍자, 생활 감정 등을 반영했고, 대체로 중장이 길어진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사설시조에 드러난 미의식으로는 현실 모순에 대한 비판,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풍자, 고달픈 생활을 웃음으로 극복하는 해학 등을 들 수 있다.
형식은 3장 6구 45자 내외가 일반적인 평시조의 형식으로 전수되고 있다. 운율은 각 장에서 3.4조, 또는 4.4조의 음수율, 4음보가 기본으로 지켜지고 있으며, 종장의 형식으로 첫 음보는 3음절로 고정되어 있고, 둘째 음보는 5음절로 형식적 제약을 굳혀 놓고 있다.
평시조가 한 수로 되어 있으면 ‘단형시조’, 평시조가 2수 이상이 모여 있으면 ‘연시조’라 하고, 평시조의 형식에서 종장의 첫 구절을 제외하고 어느 한 구절이 평시조보다 길어지는 형태를 엇시조라 한다. 또 평시조의 형식에서 초장과 중장이 제한 없이 길어지고, 종장도 어느 정도 길어진 시조를 사설시조라 한다.
시조에서 초장은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 중장은 사회 세태, 종장은 자신만의 의식 세계를 주로 다루고 있다. 3수일 경우에는 1수가 초장, 2수가 중장, 3수가 종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리듬은 초장 3.4, 3.4, 중장 3.4, 3.4, 종장 3.5, 4.3의 음절을 4음보로 지켜 주어, 우리 민족의 리듬 감각을 최대한 살려 놓고 있다.
전체적으로 짤막한 시적 형상화 속에 이미지 구현, 낯설게 하기, 자연스런 리듬, 번뜩이는 착상,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 전율이 흐르게 하는 깨달음, 미소짓게 하는 해학의 미, 가슴을 적시게 하는 새로운 인식, 삶을 윤택하게 하는 발견의 기쁨, 포근하게 감겨드는 사색 공간 확보, 향수에 젖게 하는 추억 배치, 행복하게 하는 마음 고백 등이 시조의 맛과 멋을 더 한층 빛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요약해 보면, 시조란 정형율격을 지키며 민족 정서의 가장 향긋한 곳까지 시적 형상화로 드러내고 있다. 그 정서는 미적 가치의 그릇에 담겨 새로운 예술미로 다가온다. 초장에서는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주로 깔리고, 중장에서는 세상사, 세파, 인생사가 다뤄진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반전을 보이거나, 시적 화자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리듬을 타고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 구현이나 시적 형상화가 보태져 빛을 발한다. 그 통로를 통해 시조의 의미가 더욱 더 깊은 맛을 내고, 감동을 빚어낸다. 시조의 리듬은 되도록 자연스럽고 흥겨워야 한다. 마치 자연의 소리처럼 느껴져야 한다. 마음속 핏줄이 있고, 그 속의 흐름이 몸속의 호흡과 어우러져야 한다. 거칠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이 나야 한다. 이왕이면, 감성을 터치해, 감동의 전율이 등골에 흐르도록 시적 형상화해 놓아야 한다. 시조의 소재는 다양할수록 좋다. 사물을 바라보거나 삶을 해석하는 게 새로울수록 그 가치가 더 높아진다.
강덕순 시조시인은 위와 같은 시조의 특질을 두루 갖추어 독자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긴장감을 주면서, 눈길을 확 잡아 끌어당겨 감동으로 이끌고 있다.
앞으로 제3, 제4 시조집을 펴내며, 여생을 보다 풍요롭고 알차게 살아가길 기원한다.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하며, 사물을 보다 새롭게 해석하고, 사물의 낯설게 하기와 이미지 구현을 통해 시조의 시야를 보다 넓히고 깊이를 더해 가길 소망해 본다.
- 새봄의 기운이 스멀스멀 스며드는 화단을 바라보며
한실문예창작 지도 교수 박덕은
(시조시인, 문학박사, 전 전남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광주시민사회단체(523개)총연합회대표회장, 대한민국시문학협회 회장, 노벨재단 이사장,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