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택시 운전사가 만난 우리 시대 사람들
정오를 막 지난 시각에 포스코 뒷골목에서 이십 대 여성 한 명을 태웠다. 그녀는 서울구치소로 가고자 했는데 이동 시간 30분을 요구했다. 카카오 택시 앱이 예상한 시간은 40분이었다. 앱에서 알려주는 대로 운행하는데 갑자기 승객이 “이상하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요구대로 경로를 재설정해 달리는데도 그녀는 계속 불만을 제기했다. 예상 시간에 택시가 구치소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제가 조울증이 있어서요”라 말하고 면회소로 총총히 들어갔다.
면회소를 향하는 승객을 보며 택시 운전사는 대구교도소에서 아버지를 만난 초등학교 저학년생 때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날 교도소장이 특별 면회를 허락해서 어머니와 3남매는 소장의 접견실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정치범이었던 아버지에게 특별대우를 해 준 것이다. 아버지와 식구들은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먹었고, 어머니는 교도소장과 교도관들에게 음식 일부를 대접했다. 택시 운전사는 승객의 남자 친구가 어떤 이유로 구치소에 갇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정장 원피스 차림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그녀의 급하고 애타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생활인이자 시인인 이송우가 야간 택시를 운행하면서 만난 우리 시대 사람들 이야기다. 하루치 노동을 마친 땀내 나는 청년들부터 콜을 부르지 못해 손을 들어 택시를 잡는 노인들까지 다양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택시 운전사는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에서 ‘우리 시대’와 ‘자신의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떠올린다. 남자 친구의 면회 시간에 맞춰 서울구치소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 여성한테서 어릴 적 대구교도소에서 아버지를 만난 기억을 떠올린다. 이제는 야근하지 않는 광고회사 국장한테서는 큰 기업에서 대여섯 시간만 자며 일하던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 떠올림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인혁당재건위 사건 피해 생존자의 아들, 곧 ‘빨갱이 자식’으로 자라면서 그가 겪어야 했던 견딤의 정서다. 이 책은 글쓴이가 택시 운전사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묶음이자,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과 나눈 대화록이다.
‘빨갱이 자식’의 성장 서사
4월 9일은 국제법학자협회가 선언한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다. 1975년 4월 9일 새벽,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지 불과 20여 시간 만에 사형당했다. 이 책을 쓴 이송우는 인혁당재건위 피해 생존자인 이창복의 아들이다. 전도유망했던 이창복의 삶은 8년간 수형 생활과 이어진 12년간 보호관찰로 무너졌다. 그리고 연좌제에 따른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으로 가까운 친구들에게 말 한마디 못 했던 오랜 시간, 가까운 친구를 만들기 어려웠던, 아니 만들어서는 안 됐던 환경. 이송우 역시 그렇게 주홍 글씨를 숨기고 살았다.
지긋지긋한 이 국가 폭력의 기억은 ‘인혁당재건위 피해자 대상 국가 배상금 반환 소송’을 통해 다시 피어났다. 그리고 2023년 6월, 장장 10여 년을 끈 사건, 특히나 최근 몇 년간 이송우의 삶을 갉아먹은 이 다툼은 부모님의 부동산을 매매하고, 매매금의 대부분인 약 5억 원을 소위 ‘부당이익금’이라는 명목으로 고등검찰청 소송과에 납부하면서 종결됐다. 이 과정에서 이송우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때로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혼자 앓았던, 빨갱이 자식이라고 나무에 묶인 채 다가오는 밤에 몸서리쳤던, 나고 자란 곳을 떠나야 했던, 그래서 누구에게도 가족사를 말하기 두려워했던, 폭력에 맞서기 위해 폭력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소년을 생각한다.”
이렇게 청소년기의 중요한 심리 과제인 ‘사회화’를 제대로 배우고 익히지 못한 이송우는 직장 생활하고 나서야 사회화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누군가와 합을 맞추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 없는 협업의 구조가 그의 눈과 귀를 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야간 택시를 운전하면서 스스로 불편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반갑게 인사하고 승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무거운 짐을 싣고 내린다. 외진 길은 후진으로 나오는 한이 있어도 진입한다. 회차 시간이라도 길가의 노인은 태운다.” 봉인에서 해제된 고통스러운 기억을 통해 그가 마주한 것은 성숙해진 자기 자신이었다.
아직 우리는 견디는 중입니다
15년 전에 글쓴이는 택시 운전사 자격증을 땄다. 칸타코리아에서 약 10년간 일하던 때다. 자격증을 따고 난 다음 삼성전자 프린팅 사업부와 그 후신인 HP코리아에서 13년을 일했다. 그리고 약 2년 전 ‘삼성 출신 마케팅 인력은 (임원) 승진이 사실상 어렵다’라는 내용을 통보받은 뒤 미련 없이 회사를 나왔다. 그 뒤 칸타코리아로 돌아와 프리랜서 데이터 분석가로 일했다. 그러다 2023년 중반에 삼성 반도체 사태가 벌어졌고, 삼성전자의 프로젝트가 끊기다시피 했다. 그는 택시 운행을 병행하게 됐다.
글쓴이는 야간 택시를 운행하면서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승객들을 만났다. 미술을 전공하고 그것을 생업으로 삼았던 대리기사, 대기업 임원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대리기사를 만났다. 대기업 임원 출신 대리기사는 이태원 참사로 자식을 잃고 밤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 대리기사가 됐다. 또한 정부 지원으로 중동 사업에 뛰어든 사업가, 승진 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만취한 가장, 아이들이 걱정할까 봐 몰래 병원을 가는 중년의 여인, 콜을 부르지 못해 손을 들어 택시를 잡는 노인들도 만났다. 그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작은 ‘만인보’다.
글쓴이가 밤의 택시에서 만난 사람들을 기록하는 바탕에 있는 정서는 바로 ‘견딤’이다. 그 견딤은 인혁당재건위 사건 피해 생존자의 아들로 자라면서 그가 겪은 경험의 산물이고, 지독한 경쟁 속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신히 대학교에 입학하고, 다시 쉼 없는 경쟁을 거쳐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결국 물러나야만 했던 치열한 삶의 산물이다. 글쓴이는 섣불리 낙관하거나 쉽게 비관하지 않는다. “아직 우리는 견디는 중”이라고 “아직 우리는 힘을 모으고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