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열풍지대를 꿈꾸다
나무처럼 살고 나무처럼 늙겠다는 나남출판 조상호 회장이 특유의 ‘굴곡체’로 46년 출판의 대장정을 직접 기록한 저서 《숲에 산다》(제3판)를 출간했다.
군사독재가 유신의 절정으로 치닫던 1979년, 사상의 자유가 편견 없이 교통할 수 있는 열린 공간, 지성의 열풍지대를 꿈꾸며 출판사를 열었다. 튼튼한 사상의 저수지를 쌓는 정성으로 4,000여 권의 책을 세상에 펴냈다. 질풍노도의 꿈을 이루려 내달린 46년 세월이었다.
생명의 숲에서 흐르는 시간을 기록하다
세속의 크고 작은 유혹을 견디며 숨 쉴 수 있는 출구로 만든 수목원에서 생명을 가꾼 지 17년째다. 20만 평 나남수목원을 만들어 직접 나무를 심고 가꾸는 저자는 계절의 순환에 호흡을 맞추며 피고 지는 수목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책 속에 담았다. 도시에 살면서 야성을 송두리째 잃은 이들이라도 저자의 숲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생명의 감각을 되찾을 만하다.
“봄의 전령사를 자임하는 산수유와 히어리, 생강나무의 노란 꽃들이 순서 없이 다투어 내는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신생아의 울음처럼 울리며 고요한 산중이 갑자기 왁자지껄해진다.” (휘청거리는 봄날에)
“여름의 숲에는 녹색의 향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름나무들의 꽃구경은 이팝나무의 하얀 꽃에서 시작한다. 여름 한철 백일 가까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태양에 맞서는 붉은 배롱나무의 꽃그늘로 여름은 조금 화려해진다. 귀하다는 노각나무가 하얀 동백꽃 같은 작은 꽃들을 떨어트리고 나면 형형색색의 무궁화나무꽃이 뜨거운 여름과 대적하며, 추석 무렵까지 그 여름의 추억을 전한다.” (태양에 맞서는 여름나무꽃들)
“이마에 스치는 삽상한 기운이 가을이다. 위대한 여름의 천둥 몇 개씩이나 품었던 열매를 맺고는 내년 봄의 나무건강을 위해서 잎을 떨굴 준비를 하는 빛과 색의 향연이 절정이다. 계곡의 물소리도 한층 맑고 청아하다. 뒤뜰 장독대에 날아든 붉은 감잎 한 장에 가을이 무르익는다.” (“오메 단풍 들것네”)
“산들이 하얀 고깔을 썼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제국의 통일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눈 이불을 덮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계곡을 감추고 바위까지 눈으로 덮은 산등성이도 부드러운 곡선을 뽐낸다. 설원(雪原)에 부딪혀 꺾인 햇살이 눈을 찌른다. 애지중지 기르는 자작나무들의 하얀 몸통에 반사된 빛인지도 모른다.” (숲에도 눈이 내린다)
기억의 장소와 기록의 시간
기록은 기억의 공간을 채우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저자의 말을 일부러 꺼내지 않더라도, 이 책은 이 땅에 없는 것을 찾던 뜨거웠던 스무 살 청년의 기억부터 오늘날 나남을 이루어낸 뼈대와 속살까지 들여다보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20대에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던 ‘책에 눈뜰 무렵’, 마치 신심 깊은 종교인이 경전을 대하듯 길돌 차동석의 칼럼을 필사했던 ‘글에 눈뜰 무렵’의 기록에는 한눈팔지 않고 한길만 걸어온 출판인의 DNA를 담았다. 특히, 대학도서관의 힘을 빌려 어렵게 찾아낸 길돌 선생의 글이 영생하기를 기도하며 몇 편을 옮겨 실었다.
짧은 메모와 사진의 기록들을 희미해진 기억들과 짜맞추며 복원한 ‘기억의 장소’, ‘짧은 기록의 시간들’에는 출판 46년 대장정의 여정을 담았다. 학생운동 주동자가 된 뒤 제적된 최전방 방책선 소총수로 겪은 경험에서 시작한 개인적 회고는 출판사를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당대의 작가, 지성인들과 만나면서 문화사적 기록으로 확장된다. 23년간 지훈상(芝薰賞)으로 기리는 조지훈 선생, 삶의 통찰을 준 비화밀교의 이청준 소설가, 토지의 어머니 박경리 선생, 언론출판의 길을 밝혀준 명칼럼니스트 김중배 동아일보 대기자, 동굴 속의 독백을 웅변으로 승화한 영원한 스승 리영희 선생, 마지막 광복군 김준엽 고려대 총장 등 출판의 길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이들이 그에게는 ‘북극성’ 그 자체였다.
세상에서 가장 큰 책
조 회장은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 《언론의병장의 꿈》, 《나무심는 마음》 등의 저서를 내고, 신문 칼럼니스트로도 유명한 작가이다. 나남출판이 발행한 계간 〈사회비평〉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던 송호근 교수는 조 회장의 칼럼을 읽고 “사실, 그는 세속적 직함답지 않게 문사(文士)”라며 “독자를 이리도 작아지게 만들어도 되나, 하는 심통을 솟구치게 만든다”는 후기를 전했다. 특유의 농익은 ‘굴곡체’로 쓴 뚝심 있는 글들을 따라가면, 나무가 책이고 책이 곧 나무인 거대한 숲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