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역병으로 병원도 한산하다
사나흘이 멀다 하고 중환자실 따라들면
콸콸콸 산소호흡기
폭포 소리 들린다
비가 와야 폭포다, 비와사폭포란다
서귀포 악근천 상류 협곡을 끌고 와서
한바탕 뚝 터진 가슴 비워내고 가는 벼랑
길어봤자 사나흘
비 그치면 도루묵인데
아프다, 아프다는 건 살아있단 반증이다
어머니 한 생애 같은
엉또폭포 울음 같은
- 「비와사폭포」 전문
죽으면 육신의 쾌락과 고통이 일체 사라진다고 믿는다. 이 시에서 폭포 소리에 비유되는 울음은 어머니의 한 생애와 오버랩되면서 아파서 나오는 소리에 은유된다. 울음은 소리를 동반하기도 하지만 속울음처럼 소리를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폭포 소리가 주체에게 울음소리와 같이 인지된 것은 고통 속에서 살아온 어머니의 생이 여전히 주체의 눈에 선명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체의 어머니는 첫수에 등장하는 바와 같이,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한 채 온몸으로 아픔을 감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비와사폭포’는 비가 와야 빗물이 모여 쏟아지는 폭포가 된다고 한다. “서귀포 악근천 상류 협곡을 끌고 와서/ 한바탕 뚝 터진 가슴 비워내고 가는 벼랑”인 그것은 많은 비와 함께 내면의 맺힌 설움과 답답한 심정을 쏟아내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엉또폭포라고도 하는 이것은 비가 그치면 폭포도 감춰지게 되는데, 마치 울음이 그친 이 상황은 고통이 사라진 상태로 산소호흡기를 뗀 것처럼 살아남을 길이 막막한 상황이 되었음을 환기한다.
아마 작명가의 작명은 아니지 싶다
퍼내고 또 퍼내도 그만치 차오른다
조천포 발치에 와서
썰물에나 차오른다
아침저녁 유배객들 절을 하는 연북정
무슨 죄목으로 여기까지 내몰렸을까
그 모습 훔쳐보려고
물 길러 온 순덕이
몇 번을 길었다 붓고 길었다 다시 붓고
말 한 번 못 걸어도 사랑은 사랑이다
물허벅 지는 둥 마는 둥
불배나 켜는 바다
- 「조천 두말치물」 전문
제주도의 조천읍에 있는 두말치는 마을 사람들의 식수를 해결해 주는 곳이었다. ‘두 말 정도의 곡식이 드는 크기의 솥. 또는 그 솥에 가득한 밥’이라는 의미를 품은 두말치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곳은 물을 “퍼내고 또 퍼내도 그만치 차오”르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바닷물이 빠져나갈 때 오히려 물이 차오르는 곳인데, 주체는 퍼내도 퍼내도 차오르는 이 모양을 사랑이라고 이해한다. 물이 마르지 않는 두말치 물은 가족을 먹이고 씻기고 작물도 자라게 하는 어머니의 젖줄이며 생명이며 사랑이다. ‘사랑’의 어원은 한자어 사량(思量)에서 찾아볼 수도 있고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또 다른 어원은 사랑의‘사’가 동서남북, 사방(四方)을 뜻하며, ‘랑’은 앞말과 뒷말을 연결하는 접속조사로 ‘사방을 모두 이어준다’는 뜻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모든 걸 숨 쉬고 살아갈 수 있게 소통하고 연결하는 것이 사랑이다. 물은 모든 것을 품고 살리는 역할을 한다. 조천읍에 살고 있는 제주 도민들에게 물은 생존이면서 결국 사랑이었던 것이다. 두말치 물 한쪽에 물허벅을 메고 물을 뜨러 온 제주 여성의 석상이 두물치의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신들이 섬을 비운 신구간 무렵이었다
느량 바람이 사는 너븐숭이 빌레왓
여남은 애기구덕만한
돌무덤 생겨났다
옴팡밧 학교 운동장 당팟 저 학살터들
죽은 어멍 젖을 빨던 아기도 이젠 세상 뜬
이 땅에 그 누가 남아 저들을 달래줄까
중얼중얼 주문처럼 자장가 불러본다
애기구덕 흔들다 끄덕끄덕 나도 졸던
4ㆍ3 땅 설룬 애기야
‘자랑자랑 웡이자랑…’
- 「너븐숭이-애기무덤」 전문
4ㆍ3 항쟁 때 자행되었던 무자비한 학살과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 중 하나는 애기무덤이 있는 너븐숭이다.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전쟁은 정치인들이 일으키고 전쟁에서 죽어 나가는 자들은 그 나라의 젊은이들이거나 사회적 약자들이다. 제주 4ㆍ3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이 낳은 민족의 비극을 보여준다. 소모적인 사상 논쟁으로 인해 무고한 자들의 희생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문제는 그 당시에 있었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남북 분단을 악용하는 비인간적인 이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과 신념이 달라 싸울 수는 있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線)이 있으며 우리는 그 선(線)을 지켜야 한다. 자신과 다른 신념과 가치관과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선(線)을 지켜가며 싸우고 타협하고 조정하며 협상해야 그것이 민주주의다.
몇 차례 열과 끝에 때늦은 여름순이 났다
저 살겠다고 못 본 척 눈감은 어미목木의 배신
물컹한 열과를 따다
그만 속이 터진다
- 「열과를 따다, 문득」 부분
문순자 시인의 시에는 태풍과 가뭄 등과 같은 기후 현상에 의해 영향을 받는 감귤 농사가 부쩍 많이 등장한다. 시인의 체험적 사유와 경험지식을 바탕으로 한 시적 진술과 묘사를 통해 개별적인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 확장된다. 이 시 역시 “폭염과 긴 가뭄에 목타던 타이벡 감귤”에 대한 걱정으로 충만한 시적 주체의 아픈 심정을 열과(裂果)를 따는 과정으로 드러낸다. 어미목(木)은 찢어진 열매들에 더 이상 양분을 주지 않아서 이미 열과가 된 과일은 더 물컹해질 수밖에 없다. 가망이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고 새로운 순을 내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주체는 속상한 마음에 “저 살겠다고 못 본 척 눈감은 어미목의 배신”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도 효율을 따진다는 것을 주체도 안다. 번식할 수 있는 열매를 맺게 하려고 나무도 애를 쓰며 에너지를 쏟을 것이다. 가능성이 없는 곳에 에너지를 쏟으면 나무도 힘들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과일 농사를 하는 주체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움에 속이 터진다. 시인은 「장갑의 힘」을 통해서도 감귤 농사의 고초를 풀어내고 있다. 감귤나무에 달라붙어 기생하는 깍지벌레나 명주달팽이가 독한 농약에도 죽지 않고 지독하게 살아남는다는 내용을 묘사하며 감귤 농사에 대한 구체적인 애로사항이나 고충을 전하며 농부의 애달픈 노고의 현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球는 어디서든 날 비추는 거울이었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전시관 한가운데
구슬 속 나를 찍다가 나를 찍는 구슬을 보네
수많은 거울 속에 대책 없이 갇혀버린
사방에서 되비치는 내 모습에 내가 놀라
그 자리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 없었네
- 「구슬 거울-장 미셀 오토니엘」 전문
‘구(球)’에는 구슬 혹은 공같이 둥글게 생긴 원형의 물체라는 의미가 있다. 주체는 어느 방향에서도 같은 모양인 구(球)가 “어디서든 날 비추는 거울이었”음을 고백하며,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장 미셀 오토니엘의 작품 앞에 선 자신을 마주한다. “구슬 속 나를 찍다가 나를 찍는 구슬을 보”는 장면은 곧 “수많은 거울 속에 대책 없이 갇혀버린” 것 같은 난감한 상황으로 번지며 오히려 “사방에서 되비치는” 모습에 놀라는 장면으로 확장된다. 주체는 더 이상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데, 이 부분은 시인이 구슬 거울을 통해 성찰과 반성을 유도하는 핵심적인 대목이다. 『화엄경』에서는 인다라망의 구슬들이 서로를 비추어 끝이 없는 것처럼 법계法界의 일체 현상도 끝없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연기(緣起)한 것이어서 서로에게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설명한다. 결국 유리구슬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연기적(緣起的)인 우주의 섭리를 품고 있다. 즉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우침이 여기에 있다.
이처럼 문순자 시인은 ‘구슬 거울’을 통해 자아 찾기를 시도하며 때로는 유턴이 필요한 삶이 안정적임을 역설한다. 모든 재앙과 사고는 인간의 탐욕과 무지 그리고 성급함이 만들어 낸 결과일 수 있다는 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문순자 시인은 “수능시험 망쳐도/ 한 해 농사 망쳐도// 더 이상 ‘죽 쒔다’는 말 함부로”(「부안 백합죽」) 하지 말기를 다짐하고 요구한다. 그러면 “감귤꽃 향기에 취해 벌렁 드러눕는 봄날”(「감귤꽃 필 무렵」)이 오지 않겠는가? “죄 없이 떨어진 벚꽃”(「고사리장마」)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힘은 세상에 대한 배려와 존중,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문순자 시인은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감귤나무 전정을 하며/나훈아의 노래 ‘공’을 듣“고 살아가다보면 “비운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고백한다.
제주라는 특별한 장소와 공간을 시적 보통명사로 소환하여 아름다운 비움의 메타포를 선사하는 문순자의 시조의 행간을 거닐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