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봄부터 여름 사이 베를린장벽길을 걸었다.
독일 통일을 연구하기 위해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연구소에 몸담았다. 그 와중에 우연찮게 베를린장벽길을 접했다. 재미 삼아 두어 코스 걸어보겠다고 시작했는데 결국 14개 코스를 모두 걸었다. 전체 길이 160km, 400리에 해당한다. 주말을 이용해 한 코스 정도씩 걷다가 나중에 속도가 붙자 일주일에 두세 코스를 걷기도 했다.
동, 서독 분단 시절 베를린을 동, 서로 갈랐던 베를린장벽에 대해선 많이 들었지만 베를린장벽길이 있다는 건 독일에 가서야 알았다. 분단 시절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 내에 섬처럼 존재했다. 베를린장벽은 이 서베를린을 빙 둘러싸 설치됐다. 2차대전 승전국인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 연합국이 독일 땅을 동, 서로 분할 점령했고, 다시 소련 영역 안에 있던 베를린을 네 구역으로 나누어 점령했다. 수도 베를린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서베를린은 미·영·프 3개국이 점령한 땅이고, 동베를린은 소련이 점령한 땅이었다. 냉전이 격화하면서 동, 서독이 철의 장막으로 막히고, 동, 서베를린 사이에는 장벽이 세워졌다.
베를린장벽길은 분단 시절 세워졌던 베를린장벽을 따라 걷는 길이다. 장벽길이라고 하지만 실제 장벽을 따라 걷는 길은 많지 않다. 1961년 8월 동독 당국이 기습 설치한 베를린장벽은 1989년 11월 붕괴할 때까지 28년 존속했다. 1990년 독일 통일 직후 장벽은 대부분 헐렸다. 2000년대 초반 과거 분단 역사에 대한 독일인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예전 장벽이 있던 곳을 따라 베를린장벽길을 만들었다. 베를린장벽길은 분단 시절 동독 국경수비대가 장벽을 경비하기 위해 만들었던 국경 순찰로를 따라 이어진다. 도심 구간의 경우 주택·건물이 들어서고 공원이 생겼고 외곽 구간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많다.
베를린장벽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다르게 다가왔다. 장벽길을 걸으며 장벽으로 나뉘었던 시절과 이후 시절의 변화를 어렴풋이나마 2025년은 독일 통일 3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짐작할 수 있었다. 도심의 한복판을 가르고 지나간 장벽의 폭력성과, 그 야만을 껴안고 살았던 베를린 시민들의 아픔과 용기를 떠올렸다. 군데군데 띄엄띄엄 찾던 베를린의 여러 역사 현장이 장벽이라는 한 코드로 묶여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연결됐다.
무엇보다 가슴 아프고 부러웠던 건 동서로 갈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3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장벽이 오솔길이 되고 공원이 되고 주택가 도로가 되어 베를린 시민의 삶 속에 녹아든 현실이었
다. 베를린장벽길을 걷는 내내 우리 분단 현실을 떠올렸다.
베를린장벽길은 단지 역사의 아픔과 축복만을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니다. 장벽길을 따라 숲과 들판, 호수와 강이 어우러진 대자연의 향연이 펼쳐진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어둠의 길이면서도 동시에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빛의 길이기도 하다. 걷는 내내 역사의 상흔과 빛나는 자연이 뒤섞여 잔잔하면서도 신선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이렇다 보니 장벽길을 걸었던 순서대로 기록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처음 걷기 시작했던 코스이자 시내 루트의 핵심 코스 중 하나인 노르트반호프~포츠다머플라츠 코스에서부터 기록하게 됐다. 시내 루트 6개 코스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노르트반호프~포츠다머플라츠 코스가 실제 걷기의 출발점이자 서술의 시작이기도 하다. 1부에는 시내 루트 6개 코스를 담았고, 2부는 남쪽 루트 3개 코스, 3부는 서쪽 루트 5개 코스를 담았다.
베를린의 올레길-베를린장벽길
40년이라는 분단의 역사는 독일 민족의 역사 전체를 보면 분명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분단된 체제를 견디며 살아야만 했던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 시간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분단은 독일의 많은 곳에 지금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베를린장벽길”이라고 불리는 베를린 장벽의 흔적도 그런 흔적 중에 하나입니다. 서베를린 전체를 둘러쌌던 3m 높이의 장벽이 서 있던 자리를 따라 만들어진 이 장벽길을 저는 베를린 올레길이라고 부릅니다.
분단 시기 서베를린은 동독 지역 한 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섬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1961년부터는 도시 전체가 높은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인 하나의 감옥과 같았던 서베를린에서 분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베를린장벽이 사라졌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휴전선이 사라지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를린장벽길은 그런 암담했던 날들의 기억을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저자는 160km가 되는 베를린장벽길을 전부 걸어서 완주한 몇 안 되는 언론인일 것입니다. 그 경험을 기록한 글을 책으로 출판하는 것은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그의 글에는 장벽길 곳곳에 남아 있는 분단과 통일의 흔적을 둘러보는 한국 사람이 느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분단과 냉전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이 더욱 아프게 느껴질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