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섣불리 이다음을 약속하지 않는 시
영혼은 고독한 물질이다
몸이 죽은 뒤 잠깐 어리둥절한 시간
기회가 된다면 소멸을 자각할 것이다
눈도 귀도 사라져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모양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
(……)
이 생을 어디로도 넘길 수 없다
사라지는 모든 것을 여기서 붙잡아야 한다
죽어 가는 자들의 지혜가 시작될 수 있다면
여기서부터
-「유물론」에서
시집 『유물론』은 생생히 살아 있는 동안의 이 삶 구석구석을 비춘다. 시라는 장르와 유구한 세월 동안 친밀한 관계를 맺어 온 ‘영혼’이라는 존재는 서동욱의 시 안에서는 “그저 없는 것”이 된다. 영혼에게는 맛을 느낄 혀도, 불로 그슬려 타 버릴 피부도,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만한 지성도 없기 때문이다. 화자의 삶을 구성하는 면면들은 오직 현재에 속하므로, 지금 치열하게 목격하고 느끼고 붙잡지 못한다면 영영 대상에 대한 감각이 불가능하리라는 사실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시인은 섣불리 이다음을 약속하지 않는다. 눈앞을 둘러싼 현상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시적 언어로 치열하게 벼려 말하는 일이 바로 시가 해야 할 일이라는 듯, 현상의 변화와 뒤섞임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전달할 언어를 개발하는 일이 시인이 짊어질 책무라는 듯. 『유물론』은 이토록 강한 생명력으로 우리의 손안에서 펼쳐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 충실한 삶
삶에 충실하자고
강아지는 공을 쫓아 달리고
까치는 떨어진 반지를 물고 달아난다
삶에 충실하자고
에이에게 비도 양보했는데
내 삶은 과연 잘 될까?
요즘 읽은 기사 중 가장 부러운 게
잉글랜드 목초지에서 로마시대 금화를 주운 농부였는데
금화를 주웠을 경우
어디로 가지? 경찰서에 가져가면
순경들이 아이스크림 사 먹는다고
집에 피아노 배우러 오는 초등학생들이 얘기해 주었다
그들은 아주 열심히 귀띔해 주었는데
아, 쓸데없이 이야기를 옮기며 삶에 충실하지 못했구나
어른이 되면 씁쓰레할 것이다
-「충실한 삶의 어느 순간」에서
“시 쓰기는 결코 바벨 이전의 최초의 말, 사물의 본질을 간직한 말, 신의 숨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수한 말을 찾아 헤매는 모험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변동하는 상품 가격 속에서 절망하며 매번 다른 답을 찾는 주부의 장보기 같은 것이다.” 시인 서동욱은 시집 말미에 쓴 「시론」에서 이렇게 밝힌다. 언어의 본질에 다다르고자 노력하는 일보다는 오늘을 살아내고자 하는 치열한 고민이 보다 더 시에 가깝다고 말하는 시인의 선언은 낯설고도 단단하다. 『유물론』에는 빛이 사위는 순간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든 아기의 모습이 있다. 공실이 된 상점 하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화자도 있으며, 바람이 불자 칭얼거리듯 휘날리는 내복 빨래도 있다. 이토록 충실한 삶의 모습들을 읽어 내려가며 우리는 어느새 시의 한 장면이 되어 있는 우리의 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시에 복무시키기보단 시를 삶에 스미도록 만들며 『유물론』은 어느새 독자들의 곁에 스르르 다가가 있을 테다.
■ 「시론」에서
시작(詩作)은, 어떤 것이든 주어진 언어를 깨트리고 언어를 생성하는 창조 행위다. 시인은 어머니 대지의 흙이 아니라 그냥 시멘트에 던져진 씨앗이 소리를 내며 구르듯 글을 쓸 뿐이고, 그러니 시 쓰기는 시작(始作)부터가 죽음인 이상한 창조 행위다. 당연히 이런 시인의 말하기는 태초의 신의 말을 흉내내 사물에 이름을 붙이려는, 하나의 보기 좋은 세계를 일으키려는 행위가 아니다. 시는 불타는 플라스틱의 나쁜 냄새나 검은 연기처럼 구불거리며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