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이후 기업가 선정으로부터 업종 선정, 공업단지 개발, 기술 도입, 공장 건설, 운영자금 조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제조기업들의 모든 설립 과정은 사실상 정부의 공업화 정책하에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제조공장을 운영할 한국인 기술자나 경영자는 거의 없었으며 식민지 시대에 국내 일본 공장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일부 적산공장을 불하받아 운영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당시 공장 건설은 미국, 일본, 독일 등 제조 선진국들의 새로운 제조공정을 도입하거나 합작투자에 의한 기술이전 방식으로 세워졌으며 제조기술자나 고문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생산시스템을 전수받게 되었다.
초기의 제조기업들은 대부분 1960년대와 1970년대 후반까지 선진국 기업들의 하청생산(OEM) 공장으로서 디자인과 원부자재를 공급받아 가공 납품하는 방식으로 제조공장의 운영과 수출 방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제조산업은 1960년대에 섬유, 합판, 신발 등 경공업 위주에서 1970년대 제철, 화학, 석유, 1980~1990년대 전자, 반도체, 기계, 조선 등 중공업 분야의 중간재 생산으로 확대, 발전하여 갔다. 특히 우리나라의 부족한 부존자원과 국내 소비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조업은 해외 수출시장 개척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외화 획득과 기술 도입의 주역으로서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왔다. 이렇게 제조업은 우리나라 수출 주도 경제성장의 중심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난 30년은 우리나라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산업화를 동시에 실현함으로써 국가의 격을 높이는 시기였으며 특히 제조기업과 제조업에 종사한 국민들이 경제발전의 기적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제조업은 이와 같이 정부 주도의 공업화 정책에 의하여 시작되었기 때문에 민간기업이면서도 정부의 관리와 지원에 의존하는 경영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냉엄한 국제 시장에서 경쟁하기 매우 어려웠다. 1987년 군사정부의 종식과 새 정부의 출범으로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국가 개방 정책이 현실화되면서 제조기업들은 정부에 의존하는 경영방식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제조기업들이 시장경제의 경쟁체제하에서 스스로 국제화 전략을 통한 자력 경쟁의 책임 경영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자금 조달의 한계로 인한 경쟁적 외자 도입으로 10년 후인 1997년에 국가 외환위기 사태를 만나 IMF에 의한 구제 금융에 의지하는 등 경제 발전의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우리나라 제조기업으로서는 정부의 지원과 통제 대신 자력에 의한 시장경쟁으로, 비좁은 국내 시장에서 넓은 글로벌 시장으로, 빈약한 국내 금융에서 해외 자금의 금융방법으로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경쟁의 무대로 도약하면서 발생한 부작용이 IMF 사태를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최빈국가 중 하나였던 분단국 한국이 해보지 않은 제조산업을 육성하는 길에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시련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은 우리나라 경제 운영의 새로운 비전을 갖게 하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제조기업들은 정부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여 개방과 국제화 전략을 선택하였으며, 글로벌 시장에서 스스로 경쟁하는 혁신적인 기업으로 거듭남으로써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주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로 우리나라 제조업과 국민경제는 그 역경 속에서 50년의 짧은 기간에 압축 성장하여 1인당 GDP는 1960년 155달러에서, 2018년 기준 3만 달러를 넘어섰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국가별 총제조업 생산에서 한국이 5위에 기록되고 있으며 1인당 생산으로 환산하면 1위 독일(9,161달러)에 이어 한국(7,780달러)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포브스(Forbes)』에 의하면, 지난 100년간 아시아에서 가장 혁신적인 제조기업으로 삼성전자가 1위로 선정되었는데, 삼성전자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 40% 이상으로 글로벌 시장을 압도하고 있다. 일본의 소니는 삼성전자의 혁신적 고객 중심 제품 개발과 신제품 도입 속도(time to market) 경쟁에서 밀려서 세계 가전제품 시장의 1위 자리를 잃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한국의 제조업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의 특유한 환경에서 발전과 혁신의 역사를 이룩하여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제조업’으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였다.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와 남미 등지에서 ‘한국의 제조업’을 후발국가의 선진화 모델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제적인 무역전쟁과 국내의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이미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불확실한 변화에 우리나라 제조업이 어떻게 도전하여 과거의 업적을 뛰어넘는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느냐가 우리가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과거 한 세기 동안의 한국 제조업을 역사적 사실로 단순 나열하고 기록하는 것으로는 학문적 요구에 부응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저술의 목적은 첫째로 한국 제조업의 발달과 혁신의 과정을 경영학 및 관련 학문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평가하여 ‘한국 제조업’에 내재하고 있는 특유의 본질과 역량, 그리고 성과와 문제점을 학술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며, 둘째로 제4차 산업혁명과 국제적으로 불확실한 미래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앞으로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를 시사하는 것이다.
이 연구저술을 위해 행정적으로 지원해 준 대한민국학술원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특히 저술 기간 중에 일부 자료 정리와 집필의 편의를 제공해 주신 충북대학교 김지대 교수, 연세대학교 허대식 교수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저술이 책으로 출판되기까지 수고하신 문우사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끝으로 저자가 집필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격려해 준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자 한다.
김 기 영
2025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