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앙 1세대다. 하지만 우리 집은 조금 특이하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목사인데, 어머니는 신내림을 받은 보살이셨다. 스무 살 여름, 군에 입대했는데 그곳에서 신앙이 더욱 견고해졌다. 전역 후 신학대학교에 진학했고,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기 전날 어머니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우셨다.
“아들! 일하면서 5남매를 키우다 보니 엄마가 너희 모두에게 고루 신경 쓰지 못했어. 지금 생각해 보니 특별히 너에겐 더 잘해 주지 못한 것 같아 더 많이 미안하구나.”
어려운 형편과 집안의 반대 속에서 신학을 공부해야 했기에,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아 학비와 생활비를 홀로 감당했다. 어머니는 가정의 도움 없이 신학대학교를 졸업하는 내 모습을 보며 미안함과 대견함을 동시에 느끼셨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신학 공부를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나는 불평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사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 고생이라는 말 자체가 어색하다. 반면, 어머니의 삶은 달랐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입학 무렵 부모님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시면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글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겨우 열 살 남짓한 나이에 동생 셋을 돌봐야 했고, 두 여동생을 중학교까지 보내고 나서는 공장에 취직시켰다. 그리고 어린 남동생을 키워 주겠다는 약속 아래 열일곱 살에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고등학생 나이에 업둥이를 데리고 시집갔으니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지 짐작이 간다. 어머니의 삶은 말 그대로 고생 그 자체였고, 희생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머니의 삶은 철저한 희생이었다. 어머니의 유일한 소망은 자녀들이었고, 스스로 힘이 없기에 자녀를 보호하려면 부처에게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믿으셨다. 어머니는 자신이 신내림을 받고 보살이 되어야 가족이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믿어 오셨다. 오로지 자녀들의 안위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상황은 신념이 되었고 신념은 한 여인을 희생적인 삶으로 몰아세웠다.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기 전, 잠시 형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산 적이 있다. 방 두 칸 중 한쪽에는 항상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뒤에는 큰 불상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어릴 때는 작은 불상을 모시다가, 자녀들이 성장한 뒤 큰 불상으로 바꾸셨다. 불상 아래에 있는 작은 문을 열면 성인 한 명이 누울 만한 공간이 있었는데, 나는 종종 그 안에서 기도하다 잠들곤 했다. 청소년의 나이였다면 무서웠겠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은 그 어디나 성전임을 알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하나님, 각 사람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르셨기에 믿지 않는 가정에 저를 보내시고 목회자로 부르신 분명한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라는 기도를 자주 드렸다.
하나님의 부르신 뜻에 순종하는 삶은 그 어떤 것이든 감사할 조건이 충분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가 없으시기에, 나는 오늘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기쁨으로 나아간다.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입에서 흥얼거리는 말이나 노래가 곧 진심이 될 때가 있다.
“나 있잖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하늘 땅만큼.”
이 말은 만화 〈달려라 하니〉의 주제가 가사이다. 아마도 이 노래가 나오는 이유는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어머니라는 존재 때문일 것이다. 하니가 힘들 때마다 애타게 엄마를 부르며 달려갔던 것처럼, 내게도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자기 인생을 거룩하게 소비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자식을 위해 자기 삶을 던진 어머니와 불상 아래에서 기도하다 수시로 잠들던 아들의 이야기, 그러나 나를 사랑하셔서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 이야기를 지금 하려고 한다. 나는 이 글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드러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온 생애를 자식 위해 희생하신 나의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