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명쾌하면서도 지나치게 명백하지 않고,
이상하지만 거부하고 싶지 않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예기치 못하게 되새겨주는 문장을 원한다
모란이 은유를 설명하는 문장은 글쓰기에 대한 정의에도 꽤 어울린다. 우리는 글을 쓰며 "현실이라는 난해한 대상을 벽에 박아 고정시킨다”. 모란에게 있어 잘 쓰인 문장은 은유처럼 움직인다. 추상과 구체, 특수성과 보편성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감정, 생각, 공상같이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삶의 적나라한 사실과 연결시킨다. 대개 탁월함은 재능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모란은 글쓰기만은 꼭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한다. 뭘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핀잔을 들을 만큼 사소한 것에 매달리면서 통사, 단어 선택, 구두점, 조판의 미세한 부분을 조율하는 이 책은 작가가 글의 완성도를 견실히 높여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무작위로 나열된 상념들을 필연적인 이유로 깎아내고, 불완전하고 일관성 없는 단어들을 제자리에 놓는다. 간결하지만 납작하지 않고, 명백한 가치를 말하되 공허하지 않다. 좋은 산문은 시처럼 울려 퍼진다는 그의 말처럼 리듬과 운율, 박자를 얻은 문장은 어느새 세상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우리 삶은 클리셰로 뒤범벅되었다. 모든 게 다른 사람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다. 최소한 사람들이 모든 것을 기록한 한은. […] 사랑에 빠지고 벗어나는 불균형한 감각, 유독한 우정과 원한, 좌절당하거나 뒤틀린 야망, 노화와 죽음을 향한 느린 돌진, 그리고 막간에 찾아오는 웃음과 깨달음, 기쁨의 찬란한 순간들. 모든 게 흔하디 흔하고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클리셰를 여전히 살아내야 하고, 문장으로 그 순간이 얼마나 남다른 기분을 안기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체호프의 희곡 『세 자매』에서 마샤가 말하듯 “우리 각자는 자신의 삶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 각자는 자신의 문장을 써야 한다고 첨언할 수도 있다.”(271-272면)
그렇게 우리는 홀로 글을 쓴다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언어의 힘을 믿으면서
모란이 소개하는 명사의 문장들도 물론 아름답고 유용하지만, 그가 긴 지면을 할애해 이야기하는 또 다른 대상은 비웃음을 사는 나사 빠진 존재, 어딘지 미련해 보이는 이름 없는 이들이다. “이 논문은 남녀의 사랑이 스테이크와 상추의 사랑이 아님을 증명할 것이다” 같은 말도 안 되는 문장을 뱉는 산문 생성 프로그램,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타워 사이를 안전장치 하나 없이 오가며 새를 향해 손 흔들던 외줄타기 곡예사,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맞은 탄환으로 대뇌피질이 손상되어 더는 말할 수도 쓸 수도 없었던 무명의 작가. 모란은 어설픈 교훈을 설파하는 용도로 이들의 이야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미친 사람 같은 선문답에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위험천만한 장난에서, 어린이용 독서 교재 수준의 웅얼거림에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길어 올린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 우리는 시시한 일상과 그 속에 뒤엉킨 불가해를 해석할 방편을 글쓰기에서 찾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빈 지면을 앞에 두고 우리는 홀로 쓴다. 빛과 공기처럼 우릴 살아 있게 할 단어를,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문장을, 우릴 구해줄 단 하나의 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