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혜가 남긴 위대한 유산
박자혜는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다. 그의 활동은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역할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간호사라는 전문 직업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극히 제한되었던 상황에서 그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여성도 독립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주로 남성 중심의 무장투쟁이나 외교 활동에 치중되었지만 박자혜는 특히 간호사라는 전문성을 독립운동에 접목했다. 일제 강점기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은 여성의 전문성과 저항정신이 결합한 중요한 사례로, 이들의 이야기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서는 안 될 소중한 역사이다.
박자혜의 삶은 또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개인적 희생을 잘 보여준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 독립운동가로 자리 잡으면서도 여성으로서 이중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그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역할, 주체성과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의 독립운동 업적은 사후에도 인정받아 박자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길
박자혜는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 궁녀로 일했다. 그러다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면서 궁녀에서 해고되자 숙명여학교(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와 조선사 양성소에서 공부한 뒤 간호사가 된다. 간호사라는 전문직은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3·1 운동이 그를 바꾸어 놓는다.
당시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일하던 그는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만들며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간호사로 일하던 그는 동료들과 함께 태업과 시위를 조직하며 조국의 독립을 외쳤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고초를 겪었다. 일본 경찰의 체포와 감시 속에서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중국으로 망명해 옌징 대학 의학과에 진학하며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학교에서는 여성 축구부를 만드는 등 학업 외 활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조용하지만 강렬했던 활동
신채호는 구국 언론인, 역사학자, 그리고 민족 혁명가, 사상가로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조선 상고사를 집필하며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강조했고,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과도 긴밀히 협력하며 행동하는 혁명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의 저술과 선언문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지침서가 되었고, 특히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했다.
중국에서 박자혜는 이은숙(우당 이회영의 부인)의 소개로 신채호를 소개받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후 두 사람은 독립운동의 동지로서도 강한 유대감을 나눴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평범하지 않았다. 함께 산 시간도 2년 남짓이었다. 혹독한 가난과 감시 속에서도 박자혜는 신채호를 지원하며 그의 연구와 활동을 뒷받침했다. 박자혜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신채호도 그 많은 연구를 하고 책을 쓰고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자혜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신의 꿈과 삶을 희생했지만, 이는 단순한 헌신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남편과 동등한 독립운동가로서 자신의 길을 걸었다. 특히 의열단과 긴밀히 연락하고 나석주의 거사를 돕는 등 그의 활동은 조용하지만 강렬했다.
용기와 희망을 전해준, 빛나는 별
신채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 뒤에도 박자혜는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그는 조산원을 운영하며 경제적 자립을 도모했고,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일에도 헌신했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을 1년 앞둔 시점에 병고와 생활고 속에서 단칸방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다.
신채호와 박자혜는 독립운동의 길에서 만난 두 별이었다. 신채호와 동행하면서도 박자혜는 자신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지켰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포용과 헌신의 정신, 여성 리더십, 행동하는 애국심, 용기를 잘 보여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계를 넘은 박자혜의 삶은 오늘날 어린이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될 것이다. 그가 남긴 이런 유산은 우리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전해준다.
추천하는 말_사후 80여 년 만의 값진 책
“박자혜는 3·1 운동 때 서울에서 ‘간우회 사건’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옌징 대학 의학과에서 공부한 당찬 여성이다. 그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기도 했다.
어려서 아기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갔다가 궁에서 나온 뒤에 숙명여학교 의(기)예과와 조산부 양성소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원에서 일했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서울 시내 국·공립 병원 의사와 간호원들을 모아 태업을 일으키며 3·1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런 그를 조선총독부에서는 ‘과격하고 언변이 능한 자, 총독부 의원·간호사 모두를 대상으로 독립 만세를 고창한 주동자’라고 경계했다.
구국 언론인, 민족사학자, 전기 작가, 소설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이 모든 분야에서 특출한 일가를 이룬 단재 신채호 선생이 그의 남편이다. 나라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일치하는 남자와 그런 사내를 마다하지 않은 여성의 만남이었다. 운명과 숙명 사이에서 만난 두 사람의 ‘부부의 연’은 부박한 세상 좀팽이들의 백년가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박자혜는 신채호의 아내이면서 또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서 그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했다. 의열단의 활동을 열심히 돕고 지원했다. 그가 누구인가? 여성의 몸으로 홀로 중국으로 망명한 당찬 여성이 아닌가. 남편과 자식들을 먼저 보내고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던 박자혜는 조국 광복을 1년여 앞두고 단칸 셋방에서 외롭게 숨졌다. 그가 죽은 뒤 27년이 지나서야 그의 위패가 남편 곁으로 안치되었다.
박자혜 여사에 관한 기록이 그동안 간간이 단편적으로 보도되었으나, 이처럼 체계 있게 책으로 엮은 것은 처음이다. 사후 80여 년 만의 쾌거이다. 우리 역사서와 교과서에서도 박자혜의 이야기가 더 많이 소개되기를 바란다. 저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