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는 골목에서 나고 자랐다. 저자가 성장기를 보냈다는 골목은 재개발이라는 바람에 밀려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그리고 세월도 제법 흘렀지만, 어릴 적을 생각할 때면 자연스레 그 배경이 되는 골목.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어린 날의 삶, 그 자체이기도 했던 골목. 저자는 순수한 어린 그 눈에 비치고, 여린 그 마음에 새겨진 그때 그 골목의 삶, 그 애환을 반추하며 그때마다 글을 썼다. 나이가 지긋해진 이때, 지금에서야 깨달은 골목이 전하는 울림을 온전하게 전달하고자 서사 있게 글을 써 이 책에 담았다.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아래와 같이 수필, 시, 소설 형식으로 서사 있게 썼다.
그런대로 겨울맞이를 한 거 같은데, 막상 겨울이 오면 골목은 춥다. 연탄불이 꺼져서 춥고, 연탄이 떨어져서 춥고, 묵직한 솜이불을 덮어도 그보다 싸늘한 웃풍이 무겁게 짓눌러 춥고, 난로를 방 안에 설치했어도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져서 춥고, 김장김치는 아직 좀 있지만 그 김치와 어울리는 찬거리가 없어 춥고, 자식들한테 두툼한 파카 하나 사 주지 못하는 그놈의 형편 때문에도 춥다. 이래저래 겨울은 춥다. 다른 어떤 곳보다 골목은 더 춥다. 이번 겨울도 골목한테 눈보라를 몰아치며 거칠게 군다. 골목 사람들을, 그 마음을 무척이나 쓸쓸하게 한다. 지나칠 정도로 쌀쌀맞게 군다. 그러니 그 몸과 맘 어디 한군데 춥지 않은 데가 없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춥다. 그저 춥기만 하다. 우리 앞에 따뜻한 봄이, 행복한 봄날이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연탄인 나, 난 결백하다
까마득한 억겁의 세월을 까만 땅속에서 그저 까맣게 있었는데
어쩌다가 땅속보다 더 어두컴컴한 달동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골목까지 날 끌고 왔는가!
냉기 가득한 구들장을, 씻을 물을 뜨끈하게 데우려고?
허기진 식구들을 위해 밥을 짓고 국을 끓이려고?
꼬맹이들에게 달고나를 만들어 스윗하게 주려고?
해 저물 녘 고구마, 밤, 쥐포를 바삭 구워 출출한 배 채우려고?
이놈의 몹쓸 인간들!
내 몸에 구멍을 숭숭 뚫어 놓고
날카로운 집게로 내 얼굴을 쿡쿡 찔러 대면서
요구하는 건 참으로 많도다.
아무튼 사정이 딱해 보여 밤낮없이 타올랐을 뿐인데
쉬지 않고 온몸을 하얗게 불살랐을 뿐인데
나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니
자다가 일가족이 모두 죽어 나갔다니
겨울이면 내가 사람을 여럿 죽인다고 하니
어처구니없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 그저 그대들이 바라는 일을 했을 뿐인데
나는 결코 살인마가 아닌데, 난 그저 그대들한테 베풀었을 뿐인데
가까이서 보아하니 가난이 죈데
아무리 봐도 가난이 범인인데
곧 죽으면 눈길 위에 그대들 미끄러지지 말라고
산산이 부서져 처참히 뿌려질 나이긴 하지만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그놈의 가난이 웬순데 나한테 왜? 나보고 어쩌라고!
시원한 동치미 한 사발 벌컥벌컥 들이켜면 이 기분이 풀리려나
아무튼 난 억울하다.
하얀 지금처럼 나는 결백하다.
나는 결백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