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피는 꽃, 시조로 피운 꽃
-서형자 시조집 『방앗잎 같은 여자』에 부쳐
김복근(시조시인)
서형자는 꽃의 아름다움과 삶의 질곡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가 보여주는 시조에서 꽃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 높다. 단순히 노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생태적 원리를 고구하며 자신의 삶과 대비하기도 한다. 별을 찾기 위해 꽃을 바라보며 지상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혈육의 정을 그리는 다사로운 시선을 보인다. 침묵 속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관조하는 삶의 지평을 넓혀간다. 그런 과정에서 습기를 머금은 것은 굳어진다는 원리를 발견한다. 꽃이 피고 지는 모습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끼기도 하고, 덧없음을 상정하면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영감을 얻고 있음을 본다. 지상에 피는 꽃과 인간의 삶을 보면서 시조로 꽃을 피우는 그의 시작詩作 활동이 자못 흥미롭다.
1. 별을 찾아 서성이는 꽃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꽃의 생애는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짧은 생애지만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극한적인 환경에서 피어나 강인한 생명력을 보인다. 척박한 땅에서 피어나는 들꽃을 보면서 우리 인간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삶의 의지와 철학을 배우기도 한다.
지구는 눈만 뜨면 종일토록 바쁘다
앞뒤로 순서 없는 북새통 같은 하루
말갛게 겹쳐진 꽃잎 열린 봄이 다습다
황사 낀 누런 하늘 송홧가루 날린다
꽃 보러 나선 아이 눈가가 메마르고
끈질긴 자생력으로 비밀을 털어낸 입
비 갠 후 기지개 켠 샛노란 혓바늘
돌담에 옹기종기 보란 듯이 펼친다
스스로 몸살 앓는 날 깊어지는 그대 향
-「봄을 피운 모란」 전문
서형자의 「봄을 피운 모란」은 아프고 혼란스러운 봄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봄은 대개 3월 중순에 시작된다. 바람이 세고 건조해서 먼지와 황사가 사방으로 날리기도 한다. 북서풍이 꽃샘추위를 몰고 올 경우는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일교차가 큰 편이어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화자의 봄은 제목부터 반어법을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청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모란을 피운 봄」이 아니고, 「봄을 피운 모란」이다. 우리는 흔히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은 관념적으로 고생이 끝나고 행복한 날을 시작한다는 비유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화자가 말하는 봄은 기쁨과 환희의 봄이 아니다. ‘지구는 눈만 뜨면 종일토록 바쁘다/ 앞뒤로 순서 없는 북새통 같은 하루’가 열리고 ‘다행히 말갛게 겹쳐진 꽃잎 열린 봄이 다습’하다. 그러나 2수에 오면 ‘황사 낀 누런 하늘 송홧가루’가 날리어 ‘꽃 보러 나선 아이 눈가가 메마르고/ 끈질긴 자생력으로 비밀을 털어낸 입’은 텁텁하기만 하다. ‘비’가 개면 ‘기지개 켠 샛노란 혓바늘’이 돋아나 ‘돌담에 옹기종기’ 펼쳐진다. ‘스스로 몸살’을 앓고서야 ‘깊어지는 그대 향’을 느낄 수 있다.
봄이 되면 계절성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자살하는 사람 또한 30%가 봄철에 나온다고 한다. T.S.엘리엇의 말처럼 봄이 드는 4월은 ‘잔인한 달’ 그대로 인 것 같다.
이런 현상은 ‘탱자꽃’을 보면서 ‘발화는 가시만큼/ 쏟아낸 푸른 언어’처럼 ‘아프다 많이 아팠다’며, ‘눈부시게 환한 얼굴’(「보기 드문 꽃」)을 보인다. ‘물들되 물들지 않는 소금 같은 생’(「세상의 흰 꽃은」)을 살며, ‘벌레와 사귀었던 시간을 정리’하면서 ‘아쉬움’이 ‘많아/ 오지게 버티’다가 ‘바람이/ 떨구고 간/ 속울음 붉은 혈흔’에 ‘낙화는/ 말이 없’고, ‘죽어도/ 아니 죽은 듯/ 쓸쓸함을 지우’(「동백꽃」)기도 한다. ‘벌레와 사귀었던/ 시간을 정리’하고 ‘성급한 친구들은/ 지상의 꽃이 되’어 ‘오지게 버티는 나’(「풋 모과 달랑 한 개」)를 본다.
2. 혈육의 정을 그리는 시선
인간은 태어나면서 천륜에 의해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 생성된다. 부모 자식의 관계에 따라 삶의 형태는 다양하게 표출된다. 부모는 자녀를 기르고 가르쳐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쏟게 된다. 자녀는 가족의 헌신과 희생, 사랑을 일일이 헤아리지 못하지만, 나이가 들어 부모의 입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화자는 현대적인 어조와 어투로 부모와의 관계 미학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혈육의 정을 그리는 그의 시선視線은 다사롭다.
청춘에 방아를 물레처럼 돌린 그녀
사금파리 햇살 받은 이마가 눈부시다
소골댁 옅은 그림자 일렁이며 따른다
오뉴월 바람 따라 흔들리는 그 잎새
스스로 향을 숨긴 사연 많은 슬픔이다
저 능선 바라다보는 콩깍지를 벗겨 낸다
재실 뒤 대나무 숲 서걱대는 댓잎 곁에
지난해 소리 없이 퍼트린 소문 같은
파리한 낯빛의 방아 텃세를 비켜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계단 끝
보드라운 살결로 보라의 꿈을 꾸며
입안에 푸른 물이 든 채 나뒹구는 그대다
-「방앗잎 같은 여자」 전문
표제작 「방앗잎 같은 여자」는 눈길을 끄는 가작이다. 방아는 배초향排草香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풀들의 향기를 밀어낼 정도로 향기가 강한 식물이다. 남부 지방에서는 향신료로 많이 사용하지만, 독특한 맛과 향을 내뿜기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화자는 어머니를 「방앗잎 같은 여자」에 비유한다. 「방앗잎 같은 여자」는 젊었을 때는 ‘방아를 물레처럼 돌’리며, 향신료처럼 독특한 삶을 살았다. ‘햇살 받은 이마가 눈부시’기도 했지만, 세월 따라 ‘그림자가 일렁이’게 되자 ‘스스로 향을 숨’긴 채 ‘사연 많은 슬픔’ 속에서 ‘콩깍지를 벗겨 낸다.’ 세월은 흘러 ‘파리한 낯빛의 방아 텃세를 비켜 앉’게 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계단 끝’에 도달하게 되지만, 절망하지 않고, ‘보라의 꿈을 꾸며/ 입안에 푸른 물이’ 들기도 한다. 화자의 어머니는 독특한 개성을 가졌던 것으로 유추된다. 그 삶이 자신에게로 전이되어 화자와 어머니, 세상의 다른 여성으로 확산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서형자 시조인은 시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안詩眼을 가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사물과 사람들이 존재한다. 너무 흔하게 보여 거기에 있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여서 그 존재를 잊기도 한다. 이런 일상의 무심한 존재에게 보내는 화자의 시선은 독특하게 향상화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