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쓰게 된 계기
오늘날 교회와 사찰에 가지 않는 사람은 많지만, 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보고, 삶의 의미를 생각할 정도로 이제 영화는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다. 그리고 국경과 세대 차이를 넘어 세계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절실히 느낀 일이 있었다.
2018년 홍콩중문대학에 머무를 때였다. 학교 행사에서 사회자가 나를 소개하자 대학생들이 내게 몰려왔다. 10명도 넘는 학생들이었다. 해맑은 얼굴의 학생들은 내게 한국말로 인사하고 대화하고 싶어 했다. 한국어를 전공하냐고 물으니, 모두 아니라고 했다. 저널리즘, 영화, 경영학, 공학을 공부한다고 답했다.
학생회장이라고 소개하는 의과대학 여학생은 한국어가 아주 유창해,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홍콩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젊은 시절 우리가 얼마나 〈영웅본색〉, 〈화양연화〉, 〈중경삼림〉 등 홍콩 영화를 좋아했는지 말했다. 그리고 이소룡, 성룡, 주윤발, 장만옥, 종초홍, 임청하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웃으며 자신들의 부모님이 좋아하는 배우들이라고 답했다.
나는 학생들이 한국 문화와 노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절실하게 느꼈다. 학생 중엔 한국 영화 팬이 많았으며, 〈택시 드라이버〉, 〈변호사〉, 〈1987〉 등을 열심히 보았다고 말했다. 1987년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2016년 ‘우산 혁명’이 좌절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대학 교정을 거닐다 보니 ‘자유의 여신상’을 둘러싼 흰 천에 구속된 학생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들은 역사를 잊지 않고, 정말로 홍콩을 좋아했고 친구들을 사랑했다.
내가 홍콩을 좋아하게 된 것은 영화 때문이다. 홍콩은 미장센이 가득한 도시이고 지저분하지만, 맛집이 가득하며 대륙과 바다가 만나고,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며 전통과 현대가 교차할 뿐만 아니라 혁명과 저항의 정신이 넘치는 곳이기에 나는 여전히 홍콩과 홍콩 영화와 홍콩 사람들을 좋아한다. 이렇게 영화로 맺어진 홍콩과 나의 인연은 젊은 학생 세대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영화 속 인문학〉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은 영화를 통해서 본 인문학이고 사회 해석학이다. 앞서 홍콩중문대학 방문 때 홍콩 학생들과의 인연을 밝혔듯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그 사회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홍콩 감독 양가위는 혼자 영화를 보는 시간이 많았던 외톨이였는데, 이런 배경 때문인지 양가위 영화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인간의 고독이다. 〈아비정전〉의 장국영(레슬리 청), 〈중경삼림〉의 금성무와 양조위, 〈화양연화〉의 주인공 등등. 어쩌면 왕가위 영화는 자신의 고독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음 직하기 때문에 양가위 영화에 공감하고 그를 좋아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그와 대화하고 있는 셈이다.
〈1부 우리 시대의 질문〉은 자본주의 본질, 계급과 불평등 문제, 핵무기 위기 등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1장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아귀레, 신의 분노〉(1972)는 탐욕과 자본주의에 대하여 묻는다. 애덤 스미스는 상공업자의 이기심이, 막스 베버는 개신교 윤리의 금욕주의가,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사치가 자본주의 탄생의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안겨준 것은 분명하지만, 비유럽 민중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1970년대 유럽의 지식인들이 나치즘, 식민주의, 노예제 등 유럽 식민주의의 잔혹성과 유럽 중심주의의 어두운 역사에 대해 반성하기 시작한 것처럼, 〈아귀레〉는 유럽 문명 뒤에 가려진 추악한 속성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헤어조크는 20세기 후반 오락 영화와 정치 선전의 거대한 파도에 맞서 평생 싸우며 예술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질문은 계급과 불평등 문제다(2장).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마이클 무어의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기생충〉은 불평등이라는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봉준호 감독은 극심한 빈부격차가 만든 비극을 영화의 문법으로 표현했다. 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는 힐러리 클린턴이 아니라 트럼프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다. 영화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가 보여주었듯,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많은 노동자와 흑인들은 오바마의 배신에 분노해 기권했고,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던 저학력 저소득 백인 노동자들이 이민자, 여성, 동성애자를 비난하는 트럼프 지지로 돌아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변이었다.
왜 가난한 (백인) 노동자가 부유한 기업가와 그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할까? 존 조스트John Jost 교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 대가가 개인에게 너무 크기 때문에 기존 사회 체제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한다고 진단한다. 물론 그런 다급한 단기적인 처방은 심리적 진통제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들의 삶은 더 악화만 될 뿐이다. 한국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세금 인상과 복지 확대를 반대하는 ‘계급 배반 투표’가 계속될수록 불평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2021)은 불평등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군상들을 담았다. 〈기생충〉이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선을 보여주었다면, 〈오징어 게임〉은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위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투쟁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상대가 죽어야 자신이 살아남는다고 믿는다. 〈오징어 게임〉에서 우리는 치열한 생존 투쟁을 오락처럼 바라보는 백인 남성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뉴욕 월가의 금융 투자자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목숨을 건 게임에 뛰어든 456명의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처지가 비슷한 가난한 사람들과 죽고 죽이는 게임을 벌이며 돈을 벌려고 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문제는 폭력과 죽음 충동이다. 3장은 핵무기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를 살피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는 대체로 전쟁과 폭력을 다루거나 성적 본능과 억압을 다룬 줄거리가 많으며,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동기와 충동을 탐구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는 핵 공포를 묘사한 블랙 코미디이다. 미 전략공군 잭 D. 리퍼 장군의 오판, 미국 대통령의 소련과의 협상 시도와 결렬, 결국 핵폭발로 지구는 멸망한다. 이 영화는 개인, 집단, 국가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위기가 만드는 참극과 핵 공포를 보여준다. 실제로 1962년 쿠바 위기에서 실현될 뻔했던 것처럼, 한순간에 인류가 절멸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오늘도 한반도에서는 핵무기의 공포가 계속되고 있다.
2부는 사회 곳곳에 숨겨진 구조를 찾아내는 질문들이다. 문명의 의미, 인종차별주의, 페미니즘, 가상현실과 포스트모더니즘 문제들을 다룬다.
진정한 부시맨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는 인류학 연구의 새로운 방법”
프란츠 보아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등 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고,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유럽인들의 독단적인 편견이라 주장한다.
제이미 유이스 감독의 〈부시맨〉(1980)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부시맨이 비행기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발견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이 영화는 ‘부시맨의 시각’으로 서구인의 문화적 차이를 코미디처럼 유쾌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존 마셜 감독의 〈나이, 쿵 여인의 이야기〉(1980)는 다르다. 강제 보호구역에서 서구식 옷을 입고 살아가는 부시맨은 마을에 화폐 경제가 침투하자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고 사람들끼리 싸우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일종의 인류학적 민족지 영화로 볼 수 있다. 어떤 영화가 진정한 부시맨의 모습일까?
에스키모의 삶을 보여주는 로버트 플래허티의 〈북극의 나눅〉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넘어서 참여 관찰을 통한 인류학적 민속지(에스노그래피, ethnography)이다. 우리는 그의 영화를 통해 인류학적 영화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그래서 20세기 최고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영화는 인류학 연구의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부극의 논리 구조-인종차별주의
영화 비평은 텍스트 자체보다는 그 이면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영화 〈역마차〉(1939), 존 포드의 〈수색자〉(1979) 등 서부극들의 주인공은 강한 신념의 영웅이고 백인이며 인종차별주의자이다. 마이클 치미노, 〈디어 헌터〉(1978)에서도 원주민은 대상화되고, 왜곡된 존재로 재현된다. 베트남 전쟁을 다루는 할리우드 영화도 인종주의 혹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분석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숨겨져 있다.
반면 박찬욱의 〈동조자〉(2024)는 할리우드 영화의 시각에서 벗어나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파헤친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미국과 베트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의 혼란스러운 삶은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던진다.
흥미롭게도 197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흐름을 서부극에서 SF 영화로 바꾸어 놓은 대표작은 조지 루카스George Lucas의 〈스타워즈〉다. 그렇지만 영화의 ‘서사 구조’는 서부극과 똑같다. 백인은 선한 사람이고 타 종족과 민족은 악당이다. 다만 서부 영화의 악당은 원주민이지만, SF 영화의 악당은 아무리 죽여도 비판받을 일 없는 우주인이다.
시대가 변했지만, 유럽인의 편견은 서부극은 물론 SF 영화 속에서조차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그 안에 숨겨진 구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신델렐라 콤플렉스와 페미니즘
미국의 로맨스 영화 게리 마셜의 〈프리티 우먼〉(1990)은 신데렐라 신화와 유사하다. 주인공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은 로스앤젤레스 거리의 창녀에서 경마장에 가는 상류층 여인으로 변모한다. 남성에게는 돈 많이 벌어 우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야망과 환상을, 여성에게는 왕자 같은 남자를 만나는 욕망과 환상을 심어준다. 〈프리티 우먼〉은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통해 자립적 여성상보다 의존적 여성상을 강요한다.
이 영화 속에 숨겨진 구조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 속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모방 욕망과 남성성의 신화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우리의 욕망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한 결과라 주장했다. 인간은 모방을 통해 사회를 형성하며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는 대신 어떤 욕망을 추구해야 하는지 스스로 신중하게 성찰하고 결정해야 한다.
또 하나는 남성성의 신화이다. 〈대부〉 등 범죄 세계를 다루는 영화에서 보듯 남성의 물리적 힘을 과시하는 ‘숨겨진 구조’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현대 사회로 올수록 폭력이 배제되고 남성의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확인할 기회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들리 스콧Ridley Scot의 〈델마와 루이스〉(1992)와 〈에이리언〉(1979)은 남자에 의해 지위 상승을 꿈꾸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거부한다. 〈에이리언〉(1979)은 강간과 원치 않는 임신 및 출산을 거부해 여성 신체의 자기 결정권과 낙태를 옹호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보여준다. 이른바 ‘원조 페미니즘 영화’라 불린다.
한국은 선진국 가운데 가장 젠더 불평등이 큰 나라이다. 화제가 된 김도영의 〈82년생 김지영〉처럼, 여성은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이 많고, 여성의 가사노동과 돌봄의 부담도 크다. 여성의 투표권과 대학 진학률은 남자와 평등해졌고 전체 여성의 절반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지만, 3분의 1 정도만 정규직이다. 2024년 발표한 세계경제포럼(WEF) 〈글로벌 젠더 격차 보고서〉에서 한국은 146개국 142위로 나타났다.
가상현실과 포스트모더니즘-더 워쇼스키스The Wachowskis, 〈매트릭스〉(1999)
서구에서 60년대 학생 혁명이 좌절되면서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총체성과 거대 서사를 거부하고, 미래에 대한 추상적인 희망을 버린다. 〈매트릭스〉는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다. 매트릭스는 인간의 기억을 지배하는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보고 느끼는 감각은 모두 인공지능의 검색 엔진에 의해 감시를 받는다(오늘날 구글과 비슷하다). 낮에는 회사원으로 밤에는 컴퓨터 해커로 활약하는 주인공 네오는, 가상현실의 꿈에서 깨어나 인공지능에 맞서 싸운다. 또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인간들은 인류를 구원할 ‘그’(The One)을 찾아 헤맨다. 매혹적인 여인 트리니티에 의해 매트릭스 바깥 우주로 나온 네오는 매트릭스를 탈출해 반란군을 만난다.
이 영화는 우리의 앎과 의식이 무엇이고 그것이 진정 우리 것인가? 과연 실재란 무엇일까? 등 철학적 메시지를 담아 우리를 철학의 세계로 이끈다. 더 워쇼스키스는 장 보드리야르의 책에서 영감을 얻어 〈매트릭스〉를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보드리야르는 1992년 시엔엔(CNN)의 걸프 전쟁 보도 영상을 보고 ‘걸프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 세상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은 이미지의 시뮬레이션이고, 우리는 결코 실제를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사회를 제대로 해석하고 있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문제를 외면하고 간과하여 결국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기득권의 보수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포스트모던 영화감독들은 뚜렷한 줄거리가 없는 영화(허구)야말로 가장 예술적이고 지적인 작품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세상은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3부 권력은 어떻게 인간을 통제하는가?〉에서는 현대 사회 비판과 고독한 현대인의 에로스 및 〈대부〉로 대표되는 범죄 영화 등을 소개한다.
현대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과 같은 통제 사회-밀로시 포만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뻐꾸기 둥지’는 정신병원을 가리키는 속어로 인간 사회의 통제를 우화적 수법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정신병원의 이야기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브롬덴이 수용된 미국 오리건주의 정신병원에, 맥머피(잭 니콜슨)는 감옥의 강제노동을 피하려 정신질환자로 속여 입원한다. 용감한 맥머피는 병원을 통제하는 수간호사에 저항하지만 그녀에 의해 강제 수술과 전기 충격을 받고 식물인간이 된다. 그러자 머피를 좋아했던 ‘조용한 추장’ 브롬덴(윌 샘슨)은 맥머피를 안락사시키고 정신병원에서 탈출한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휩쓸자, 미국 정신병원의 인권 침해가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그러자 정신질환자의 장기 입원 제한, 위험한 전두엽 절제술 대신 약물 요법 권장, 통원 치료 허용 등 탈시설화 운동이 일어났다. 또 현대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과 같은 통제 사회라고 비판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도 재소자 인권운동에 나섰다. 푸코는 노동의 소외와 착취보다 인간의 자발적 예속에 더 주목했다.
영원한 주제, 사랑과 욕망의 현상학!
1. 스탠리 큐브릭, 〈롤리타〉(1962)
사라져 버린 롤리타를 찾다가 살인까지 저지르고 허무와 절망에 빠진 주인공 험버트는, 롤리타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사랑, 집착, 질투, 분노, 복수 등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중년 남성의 내면 심리를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2. 장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
차량 절도범 미셀(장폴 벨몽도)은 미국 유학생 패트리샤(진 세버그)와 사랑을 나누고 갈구한다. 하지만 경찰에 쫓기는 미셀은 애인의 배신으로 죽게 된다. 젊은 남녀의 질주와 혼란스런 사랑을 그렸다.
3.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의 마지막 탱고〉(1972)
주인공 폴(말론브란도)은 젊은 여인 잔느(마리아 슈나이더)과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폴은 자신에 대해 묻는 잔느에게 말한다. “나는 너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 너는 이름도 없고 나도 이름이 없어.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 거야.” 중년 남성이 직면한 고독한 위기 속 섹슈얼리티를 보여준다.
4. 헤닝 칼슨Henning Carlsen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2011)
가브리엘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원작인 이 영화의 주인공 ‘서글픈 노인’은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노년기에 찾아온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5. 알폰스 쿠아론의 〈이 투 마마〉(2002)
연상의 여인 루이사(말리벨 베르두)는 두 소년을 새로운 감각으로 이끈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그 추억을 되살린다. 멕시코 소년들의 성적 충동과 극적 체험을 다룬 성장 영화이다.
범죄 영화의 사회학 -코폴라의 〈대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지 등 젊은 감독들은 고전 영화와 유럽의 누벨바그 영화에도 심취했으나,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작가주의 영화를 추구했다. 〈대부〉가 고전적 느낌을 주는 것은 코폴라가 가진 연극적 감각이 만든 결과이다. 1950년대 서부극이 대부분 선악 구도와 권선징악의 서사를 지킨 데 비해, 코폴라의 범죄 영화는 전통적 윤리학을 부정하고 외부자의 시선이 아닌 범죄자 자신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이렇게 〈대부〉는 범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으며 197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영화가 되었다.
코폴라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으며, 누구보다도 이탈리아계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 구조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서사 구조를 재현한다. 어떤 조직에서나 권력자는 경쟁자의 도전과 후계자 문제로 고민한다. 그는 이 문제를 뉴욕 마피아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우리 이야기로 연출했다. “절대로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지니까.” 〈대부 3〉의 마이클 콜리오네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여기서 범죄 영화의 폭력성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미국 사회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노스탤지어(향수)를 느끼게 한다. 베트남 전쟁과 경제 침체로 위축된 미국인에게 강한 아버지 또는 거친 남성의 정체성과 동시에 페미니즘 등 여성운동의 발전으로 위축된 남성성이 폭력과 함께 영화 스크린에 되돌아왔다. 1970-80년대 범죄 영화의 큰 인기는 미국의 경제 위기와 고실업 및 범죄율 급등 등 미국인의 불안한 심리가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경제 호황과 범죄율 감소와 함께 범죄 영화는 시들해졌다.
왜 한국에서 범죄 영화의 인기가 좋을까?
2000년대에 들어서 〈살인의 추억〉(2003), 〈올드 보이〉(2003), 〈그놈 목소리〉(2007), 〈추격자〉(2008)는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도둑들〉(2012), 〈베테랑〉(2015), 〈극한직업〉(2019) 등 ‘1,000만 영화’도 등장했다. 한국의 범죄 영화가 성공을 거둔 비결은 강력한 캐릭터를 가진 영화의 서사 구조, 독창적인 스토리텔링, 독특한 영화적 스타일, 제작 기술이 뛰어난 결과이다.
한국의 범죄 발생률을 보면, 1980년대의 미국에 비해 매우 낮으며, 살인 사건도 선진국 가운데 가장 낮은 편이다. 하지만 “밤에 혼자 걸을 때 당신은 안전하다고 느끼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다는 답변 비율이 매우 높다. 범죄 영화는 사회가 불안할수록 흥행에 성공한다. 범죄 영화는 공포를 먹고 자란다.
한편 범죄 영화의 폭력성은 잃어버린 남성성에 대한 복고 취향과 야성적 세계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범죄도시〉가 거둔 흥행 성공의 이면에는 많은 남성 관객이 존재한다. 또한 한국 범죄 영화는 범죄를 넘어 부패와 불평등 등 사회 이슈를 다루기 때문에, 강점이 있는 것 같다. 단순한 범죄 영화가 아니라 계급 갈등과 블랙 코미디를 결합한 사회적 영화로 〈기생충〉을 들 수 있다.
〈4부 인류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가?〉에서는 우주 개발 문제, 전염병 위기, 기후 위기, 1인 가구 문제 등 관련 영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던지는 비판-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의 〈아바타〉(2009)는 환상적인 스토리텔링, 중국 후난성 장자제(張家界)의 기암절벽 등 시각 이미지, 특수효과로 흥행에 성공했다. 직접 각본을 쓸 정도로 스토리텔링을 중시하는 그의 SF영화는 인종 문제, 젠더 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룬다. 〈아바타〉에서 인류는 언옵타니움이라는 특별한 금속을 채굴하기 위해 다른 행성의 환경을 파괴한다. 마치 서구 문명이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자원을 착취하고 살육을 저지르듯이 말이다. 영화는 탐욕으로 전쟁과 환경파괴를 그치지 않고 있는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영화는 우리 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는 무기이다.
훌륭한 영상에 담긴 과학적 상상력과 휴머니티-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의 〈인터스텔라〉(2014)는 무거운 철학적 주제를 다루었지만, 대중적 인기도 얻었다. 그는 광활한 우주의 웅장함과 실패와 좌절을 겪는 인간의 용기를 아름다운 영상에 담았다. 미래의 지구에서 환경이 파기되고 인류가 살기 어렵게 되자 탐험대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 우주여행을 떠난다.
영화 속에는 상대성 이론, 블랙홀과 웜홀 이론 등 현대 물리학의 다양한 논쟁이 소개된다. 머나먼 별에서 아직도 젊은 모습을 간직한 우주비행사 쿠퍼(매튜 맥커니히)는 멀리서 늙어가는 딸의 모습을 바라본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슬픔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훌륭한 영상에 담긴 과학적 상상력과 휴머니티가 압권이다.
왕가위 영화는 자신의 고독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하이 출신인 왕가위는 어린 시절 홍콩에 이주하여 홍콩 사람들이 쓰는 광둥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따라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영화를 보는 시간이 많았으며, 결국 영화감독이 되었다.
왕가위 영화의 심층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인간의 고독이다. 영화에는 철저히 고독한 인간이 등장한다. 〈아비정전〉의 장국영(레슬리 청)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자랐고, 〈중경삼림〉의 주인공 금성무와 양조위는 여자친구에게 실연당한 남자들이다. 〈화양연화〉의 주인공도 사랑을 이루지 못해 멀리 해외로 떠나고 만다. 〈2046〉의 초우 선생(양조위 분)은 수많은 여자를 데리고 노는 플레이보이지만 사실 고독한 존재이다.
하지만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그 주인공 대부분이 고독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왜냐면 사람은 누구나 연애와 인생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중경삼림〉의 영광은 바로 이런 보편성에 있다. 우리는 외로운 존재다! 오늘도 영화 속의 고통받는 실패자를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되돌아본다. 어쩌면 왕가위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5부 왜 나는 자유롭지 못한가?〉에서는 책이 사라지고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 모습과 인간이 왜 쉽게 권위에 복종하는가를 묻고 관련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인터넷 정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사회 비판-제프 올로우스키Jeff Orlowski의 〈소셜 딜레마〉
사람들은 자신이 정보를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상 구글, 메타,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algorithm)을 통해 유도당하고 있다. 인공지능인 알고리즘은 24시간 작동하여 같은 성격의 동영상을 자동으로 추천한다. 그것은 소셜미디어 이용자가 더 많이 머물러야 광고비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고리즘은 자본의 논리와 연결된다. 소셜미디어에는 유용한 정보도 있지만, 가짜 정보와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정보가 무제한적으로 유포된다. 더 큰 문제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빅테크 기업들을 규제할 정부도 없고 통제 장치도 없다.
〈6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장뤽 고다르 등 감독들의 ‘누벨바그’ 예술 영화 운동을 소개하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오가며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고민하는 영화들을 소개한다.
‘누벨바그’(nouvelle vague)
‘누벨바그’(nouvelle vague) 운동은 1957년 이후 프랑스 젊은 영화감독들이 새롭게 시도한 예술 영화 운동이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젊은 영화인들을 육성하기 위해 영화지원법을 제정하고 시네마테크(Cinematheque) 영화관을 운영하며, 사전 제작비 지원, 단편영화 장려금, 스크린쿼터(의무 상영제)를 실시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 du cinema)』의 장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 영화평론가들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할리우드와 달리 스타 배우가 아닌 무명 배우를 기용하는 등 실험 정신과 당대의 의식 구조를 표현하려 ‘작가주의’(auteurism)를 시도했다. 그렇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알프레드 히치콕과 오슨 웰스의 제작 기법, 독일의 표현주의와 러시아의 몽타주 등은 계승했다.
왜 우리는 〈설국 열차〉와 같은 암울한 디스토피아 영화를 보는 걸까?
첫째, 뇌과학자의 분석이다. 공포 영화처럼 디스토피아 영화는 옆에 있는 연인이나 친구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뇌가 중독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 심리학적 분석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저런 끔찍한 세상에 살지 않으니 다행이다’고 생각하며, 역설적으로 심리적 안도감은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수용하게 만든다.
셋째, 현실 비판을 수용하면서 대리 만족감을 느끼고, 그래서 디스토피아 영화를 감상한다. 나아가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며, 디스토피아 영화 자체가 현실을 바꾸는 무기가 된다.
봉준호의 〈미키 17〉(2025)는 얼음 행성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젊은이 미키 반스(로버트 패티슨)가 독재자 케네스 마셜(마크 러팔로)에 맞서 싸우는 투쟁을 보여준다. 영화 속 미키는 찌질해 보이지만, 위기가 고조되면서 행동하는 인간이 된다. 우리는 디스토피아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세 번째 해석에 관심을 가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