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땅, 젠더라는 독특한 범주로 살펴본 여섯 단
단은 하늘, 땅, 산천, 농경의 신처럼 신격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사직단, 선농단 같은 장소들이 대표적으로, 조선에서는 이들 단을 대・중・소사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제사를 드렸다. 지은이는 이 중 풍운뢰우산천성황단, 우사단, 적전 선농단, 사직단, 악해독단, 선잠단 등 여섯 개의 단을 선택하여, 하늘, 땅, 젠더라는 세 범주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늘의 범주로 설명한 풍운뢰우산천성황단과 우사단, 땅의 범주로 설명한 선농단, 사직단은 하늘에 대한 제사처인 원구단을 포기하며 일어난 연쇄적 반응과 문제들을 보여준다. 가장 독특한 범주인 젠더에서는 선잠단과 악해독단을 중심으로, 조선에서 여성이 어떻게 새로운 성별 분업의 질서 안에 편입되고, 때로는 협력하였는지를 섬세하게 분석한다.
조선이 치열하게 고안한 ‘질서’의 흔적
조선은 왜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포기하면서까지 제후국의 체제에 맞는 예제를 만들고자 했을까? 제후국의 예제는 존재하는 것이었는가? 조선은 명나라의 예제나 어느 한 나라의 예제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고제古制의 실현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하며 사실상 기존에는 존재한 적도 없고 고민된 바도 없는, 새로운 제후국의 의례를 창조했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유교화가 단순히 ‘사상’의 수입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대격변이라는 외교적 현실과 정당한 권력의 모범 제시, 그리고 사회 규범의 수립이라는 절박한 과제를 풀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다고 설명한다. 1장의 외교사로 시작하여, 거듭되는 기후재난에 당혹해하는 군주, 무속적인 음사에 대한 당대의 인기, 성별 분업상의 구축 등을 다룬 이 책은 ‘유교 국가’로 나아간 조선이 치열하게 고안한 질서의 흔적을 단이라는 공간에서 읽어낸다.
세종 대 예제 논쟁을 둘러싼 통념에 대한 도전
세종 대 사직단의 제도에 대한 논쟁을 분석하며, 지은이는 조선 초 고제 및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점진적・단계적으로 발전, 심화됐다고 보는 통념에 도전한다. 길례는 이미 태종 대 완성이 됐으며, 세종 대 박연이나 집현전 등이 제기한 논점들은 이미 그 이전 세대가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왕지제’, ‘고제’ 등에 대한 당대 관료들의 언급을 맥락 속에서 섬세히 읽어내며, 이것이 당대인들이 무작정 추종했던 대상도 아니었다고 본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지은이는 조선 초의 고제나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발전이나 심화의 구도보다는 적용 대상의 확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치의 실상, 현장의 역설
이 글에서 보여주는 단의 실제 모습은 일견 당혹스럽기만 하다. 의례에 몰두한 조선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 어느 단도 《국조오례의》의 규정대로 설립되지 못했다. 심지어 지방의 사직단은 규정 자체가 마련되지 않은 채 제각각의 크기와 형태를 지녔으며, 지방 관리는 물론 중앙의 최고위 관료 출신도 정확히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숙지하지 못했다. 또한 조정에서 반복적으로 밝힌 음사 타파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성행하게 된 각종 무속적인 사당들은 과연 조선의 유교화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지은이는 그러면서도 이러한 측면만을 가지고 조선의 의례가 무의미했다든가 허상이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의례의 개조를 중시한 조선은 권력의 물리적 힘보다 논리성과 정당성을 중시하며, 규범을 합의하고 이를 준수해야 한다는 압력이 강한 정치문화를 만들었다고 본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적 글쓰기
왕조 교체기 정치외교사로 시작하여 CAD 도면을 활용하고, 마지막에는 젠더로 마무리하며 여성사까지. 지은이는 의례라는 창을 통해 특정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유연하게 시대를 읽어낸다. 또한 단, 유, 주원, 환장 등의 주요 건축 구성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문헌통고》, 《예기》 등의 출전에 대한 꼼꼼한 고찰을 통해 기존 연구에서 빚어진 오해들을 교정하고, 그것이 당대에 어떠한 의미와 위상을 지녔는지를 짚어낸다.
조선이라는 이름 아래 단순화된 이미지가 아니라, 복잡하고 입체적인 사회를 그려내는 이 책은 과거를 읽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며, 우리가 지금-여기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건넨다.